by
lemonfresh
Sep 15. 2023
지난 밤새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고 흐린 날이 밝았다. 이런 날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약 40년 전 온양역 뒤의 주택가 골목 풍경이다. 기찻길을 따라 긴 철망 펜스가 이어져 있고 그 옆길에는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그때 갓 결혼을 해서 인근의 18평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아침마다 그 길을 걸어서 역광장을 건넌 다음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거의 역에 가까워질 즈음 길게 이어진 집들의 추녀 안쪽으로 비를 피하며 걷고 있었는데 그중 어느 한 집이 추녀 끝에 곤로를 내놓고 호박을 부치고 있었다. 겉 울타리 없이 문만 열면 바로 부엌이고 현관인 집들이어서 골목이 아이들의 놀이터나 부족한 생활공간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은 풍경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어두컴컴한 날씨와 추녀 끝에서 토도독 토도독 떨어지던 빗방울,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둥글 납작하게 썬 호박이 지글지글 익어가던 모습과 고소한 들기름 냄새이다. 그 호박 부침은 가족들의 아침상에 올랐을 것이다. 요즘 우리 집도 아침마다 호박을 부친다. 마당에서 딴 호박을 쑹쑹 썰어서 아무 손질 없이 그대로 부쳐내는 것이다. 맛이 있기는 한데 뭐가 아쉬운가 했더니 기름이 달랐다. 올리브유가 좋다고 해서 쓰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들기름을 써야 하겠다. 엄마가 짜주신 들기름이 있는데 다음엔 호박 부칠 때 그걸 써 봐야겠다.
또 하나도 비슷한데 어렸을 때 비가 오는 날 엄마가 전을 부쳐주시던 기억이다. 대청마루가 생각나는 것으로 보아 내가 초등학교 때 살던 집에서의 기억일 것 같다. 어쩌면 그 비슷한 여러 번의 경험들과 대청마루가 있던 집의 기억이 섞여서 합성된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날이 궂고 아이들이 나가 놀지 못할 때면 종종 엄마가 부침개를 해 주셨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러한 부침개를 누리미라고 불렀는데 대개는 밀가루 반죽에 호박채나 부추를 넣어 부쳤었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한 장 한 장 나오는 대로 젓가락으로 찢어가며 함께 먹었다. 어떤 때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칼국수를 끓여 먹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에피소드이지만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정서를 이어주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나 말고도 우리 또래 중에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비슷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오늘 내린 비는 기온을 한층 내려서 가을을 좀 더 확실하게 해 줄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겉옷 아래에 반소매 옷을 입고 나갔지만 내일 아침에는 반소매가 마땅할지 모르겠다. 앞으로 한동안 낮에는 여름이고 아침저녁은 가을인 날씨가 지속될 것이고 비가 한두 번 더 오면 낮에도 가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만 지금의 애매한 계절도 좋아한다. 날씨가 아직 호박을 키워주는 동안에는 아침마다 반찬으로 호박을 부칠 것이다. 서리가 오고 춥고 긴 계절이 오기 전 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