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monfresh
Mar 09. 2024
점심을 먹고 나서 잠깐 쉬었다. 복도에서 아이들이 뛰는 소리,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보았다. 주의를 주려다가 아이들의 즐거운 얼굴을 보고서는 하려던 말을 집어넣었다. 뛰어가는 아이를 보고 눈을 찡긋했더니 금방 알아듣고 걸음을 늦추었다.
교무실에 들러 보았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들었는데 남쪽 운동장 끝 옹벽 위에 한 아이가 있었다. 우리 학교는 산자락을 깎아 만든 학교여서 운동장 남쪽 끝이 높은 절벽이고 그곳에는 4단으로 옹벽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맨 아랫단은 잔디와 나무가 심어진 산책길이고 두 번째 단은 평평한 잔디밭에 야외 독서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너무 높고 위험해서 올라가지 않는 세 번째 단이 하나 더 있고 그 위 네 번째 옹벽은 산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위험한 세 번째 단에 아이가 하나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어? 웬 아이가 저기까지 올라갔지?”
내가 보고 놀라서 말했다. 아이가 아닌 어른이라도 학교에서 사람이 거기에 올라가는 것은 일 년에 두 어번, 풀과 잡목을 정리할 때이다. 사람을 사서 하기도 하고 시설관리 주사님이 하기도 한다. 그럴 때에도 좁고 긴 단 위에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데 아이가 저 높이에 올라가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내다보았다. 그리고 생활 부장 선생님이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니,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갔지?”
모두들 궁금해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알겠다. 그 단의 한쪽 끝이 경사진 비탈길이다. 아이들이 그 언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기는 했지만 아마도 거기로 올라갔을 것이다. 움직임으로 보아 무언가를 집어서 아래로 던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의 움직임이 침착하고 단의 너비도 어느 정도 되어서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의 주시하면서 계속 내다보고 있었는데 내 예상대로 아이가 그쪽으로 내려왔다.
얼마 뒤에 생활부장님이 아이를 데리고 교무실로 오셨다. 아이는 교무실에 불려오게 된 상황에 놀랐는지 금방 울듯이 눈이 빨갛게 되었다. 사실 아이가 울타리 를 넘어 접근하지 말아야 할 곳에 간 것은 잘못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혼날 일은 아니다. 아이는 6학년이었고, 내 예상대로 잘못 올라간 무엇을 찾으러 갔었고, 잘 찾아서 친구들에게 내려보냈고 안전하게 내려왔다. 스스로 해결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리 어렵지 않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면 이게 칭찬받을 일인가 꾸지람받을 일인가?
“아냐. 괜찮아. 혼내려는 게 아니고 교장선생님이 놀라서 그랬어. 네가 잘 내려와서 이젠 괜찮아.”
“잘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혹시나 하고 걱정했어. 아래 학년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할 수도 있고.”
선생님들도 거들어서 일단 아이를 안심을 시켰고, 그중 한 분이 이 년 전에 그 아이를 담임했었다며 과자를 꺼내 주셨다.
“내가 너 교무실에 오면 과자 준다고 했었잖아. 자, 네가 그렇게 부르짖던 ‘까까’.”
아마도 2년 전에 그런 약속이 있었던가, 그 후에 다시 만든 약속인가 모르겠지만 그런 약속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한결 도움이 되었다. 생활부장님의 전화를 받고 담임선생님이 아이를 데리러 오셨다. 선생님도 놀란 표정이었다. 생활부장님이 약간의 설명을 해 주셨고 아이는 선생님과 함께 교실로 올라갔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뻔히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데 어른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 할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한다면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스스로 판단하지 않을까? 할 수 있으면 하는 거고 안 되면 어른들에게 도와달라고 하겠지. 사실 아이들이 던진 실내화, 운동장에서 차던 공 등 어떤 물건을 내려달라고 오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나가보면 대부분은 아이들 스스로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런 문제에 이렇게 예민한 것은 항상 그 책임 때문이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아이들은 뛰고 올라가고 다친다. 그런데 학교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행여나 선생님들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될 수가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한다. 머릿속에 안전이라는 의식을 세팅하고 바라보면 뛰어가는 애도 위험, 넘어지는 애도 위험, 떨어지는 것은 더 위험, 급식 시간도 위험(뜨거운 국), 미술시간도 위험(가위, 칼), 체육 시간도 위험, 과학실험도 위험, 조리 실습도 위험, 현장학습도 위험, 온통 위험, 위험, 위험투성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무런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안전만 도모한다면 아이의 성장은 대체 언제 이루어질까? 6학년이면 신체적 발달이 그 정도 언덕길 오를 만큼은 되어야 하고, 저 정도의 활동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인지적 심리적으로 보아도 저 높은 곳에 오르려면 어디로 오르는 게 안전한지도 탐색하고, 친구들을 대표해서 자기가 나설 수도 있어야 하고, 목표를 안전하게 수행하고, 다시 잘 내려올 수도 있어야 한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집에서 아이들이 다치는 것과 학교에서 다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지만 책임 문제는 매우 다르다. 아니, 대부분은 다르지 않은데 학부모의 성향에 따라서 매우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너무 많은 일들이 대부분의 일반적인 의식에 따라 나아가지 않고 특수한 사례나 소수의 강경한 입장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안전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높은 데에 아이가 올라갔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놀란 소리가 나왔지만 못 본 척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내가 놀라는 바람에 다른 선생님들이 보게 되었고, 생활부장 선생님이 나가서 그 애를 데려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미안했다. 내놓고 칭찬할 거리는 아니어도 아이들이 그 정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까. 내 학생이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책임 때문에 장려할 수 없지만 만약 우리 손자가 그렇게 했다면 나는 대견해했을 것이다.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면서 ‘다음엔 거기 올라가지 말자.’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담임으로서는 당연히 할 만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 아이가 앞으로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위축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면에서 보면 깎아지른 절벽 같지만 나는 자주 살펴보는 언덕이라 그 언덕의 측면을 안다. 6학년이면 충분히 올라갈만하다. 다만 나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한 것을 그 아이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이 안전 안전하면서 작은 위험도 모두 피해 가는 그런 안전쟁이들로 자라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