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욕조

소호 단상_2

by 김소형

"언니, 사람들이 다라이라고 불렀던 것 뭔지 알지?"

친동생처럼 편하게 지내는 후배 하나와 전화통화를 하는데, 문득 그 후배가 다라이 얘기를 꺼냈다. 욕조를 새로 구입하려고 온라인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옛날에 집에서 사용했던 다라이 생각이 났다는 거다.

"나 어렸을 때는 커다란 다라이에서 목욕했다~!"

상 받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는 후배 목소리를 들으며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예닐곱 살 무렵까지는 커다랗고 빨간 다라이에서 목욕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던 당시의 우리집엔 크고 작은 빨간 다라이들이 여러 개 있었다. 대부분 김장할 때나 부피 큰 채소들을 씻을 때 사용했지만, 깊이가 있는 커다란 다라이는 마당에 엎어져 있다가 우리가 목욕할 때 뒤집어졌다. 추운 겨울철엔 날 잡고 목욕탕엘 갔으니 그 욕조를 사용한 것은 대부분 햇볕이 뜨거운 여름철이었다.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차가운 물을 다라이에 받아놓고 한두시간만 기다리면 목욕하기 딱 좋은 온도로 데워졌다. 그러면 언니가 물이 꽉 차 무거운 다라이를 빙빙 돌려가며 지붕 아래 그늘진 곳으로 옮겨놔주었다.

늘 할 일이 많던 엄마와 공부하느라 바쁜 큰언니 대신 여동생 둘을 돌봐야 했던 작은언니는 높이가 낮은 다라이에는 갓난쟁이 동생을 앉히고, 깊고 커다란 다라이에는 나를 앉힌 뒤 머리를 수건으로 둥글게 감싸 올려주었다. 우리는 지붕 틈새로 가늘게 비쳐드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면서 언니가 얼른 등 밀자고 재촉하는 걸 못 들은 척하고 까오까오 물놀이에 열중하곤 했다.


그 즐거운 기억 때문에 나는 큰아이가 어렸을 때도 욕조를 놔두고 다라이에서 목욕을 시켰다. 플라스틱 욕조는 작은 아기의 몸이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 쉽지만, 다라이는 미끄럽지도 않고 온도차에 민감하지도 않아 편하게 목욕을 시킬 수 있었다. 아이는 몸집이 제법 커진 뒤에도 다라이에 들어앉아 커다란 배에라도 탄 양 흐뭇해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이제는 집에서 사라져버린, 재래시장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빨간 다라이. 사극 여주인공이 꽃잎 동동 띄우고 목욕하는 욕조보다 더 호사스럽고 따뜻했던 다라이 생각에, 후배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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