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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Aug 17. 2018

아기와 나

나도 살아보려고, 잘

  군 전역을 앞둔 ‘도일’(이이경)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별 감각이 없다. 결혼을 약속한 ‘순영’(정연주)과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어도 집 안에서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막내아들일 뿐이다. 그는 그저 엄마가 바라는 대로 상황이 시키는 대로 ‘젊은 아빠’가 될 예정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순영이 사라지기 전까지. 영화 <아기와 나>는 아기만 남겨두고 떠난 순영을 필사적으로 찾는 도일의 이야기이다. 그는 처음에 ‘왜’ 그녀가 떠났는지 찾아 나서지만, 그녀를 찾는 과정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몸으로 부딪쳐가며 깨닫는다.      



- 나도 살아보려고, 잘     


  순영이 아기를 두고 사라진 데 더불어 엄마까지 암이 재발하여 앓아누웠다. 그러자 주변 가족들은 모두 이를 갈며 도일에게 “너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도일은 말한다. “나는 뭐 양심도 없냐? 왜 나한테 지랄이야!” 주위 사람들에게 집안의 아픈 손가락이자 망나니로 낙인찍힌 도일이 다시 보이는 순간이다. 모두들 도일과 순영 그리고 아빠를 모를 아기를 정리하려고 들 때, 도일은 필사적으로 순영을 찾아내려하고, 현실과 감정 사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아기의 미래를 고민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철없는 도일보다 철든 주변 어른들이 더 냉혈한 까막눈이들 같다. 

  주변 가족들은 도일의 가족을 놓고서 평가한다. 도일의 가족은 조각났다. 엄마와 아들 둘로 구성된 집안에서 형은 거의 연을 끊었고, 도일은 내놓다시피 자란 것 같다. 이런 도일의 가족에 번듯한 안정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도일의 결혼이었다. 그들은 정착하는 도일을 두고서 모든 일이 제자리로 흘러가는 데에 안도했었다. 가족 안의 사람들이, 그 관계들이 묘하게 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그리고 그것이 변질되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버리는 것처럼 가차 없이 가족을 조각내기로 한다. 

  하지만 도일의 양심은 그렇지 못하다. 그는 말없이 그를 두고 사라진 순영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왜 도망친 건지,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지. 그리고 순영을 찾는 내내 순영이 선물한 아디다스 저지를 입고 다니던 그는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철 없어보여도 그의 마음은 이미 닻을 내렸다. 단지 파도가 심해 흔들렸을 뿐. 

  도일은 순영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그녀가 홀몸으로 도시에서 겪었던 굴곡진 삶을 읽어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에 대해 보다 무겁게 실감한다. 자신의 아기가 아닌 것이 확실한 아기는 그에게 선택지로 주어진다. 모든 걸 잊고 씻어낸 다음 새 사람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깨어진 가족을 붙여서 ‘아버지’로 살아갈지. 아기를 돌보고, 직업을 얻고, 순영을 찾아가며 무언가 ‘책임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부딪쳐 깨달은 그는 양심에 따라 아빠의 삶을 선택한다. 

  떠났을 때만큼이나 불현듯 도일 앞에 나타난 순영이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말에 그녀를 마주한 복잡한 마음이 도시의 소음으로 대신 전해진다. 그는 “이젠 너 안 잡아, 너 마음대로 해.”라고 짧게 말한다. 순영은 자신이 한 거짓말이, 그리고 그것이 밝혀져서 놓쳐버릴 것들과 다시 굴러 떨어질 지난 굴레들이 무서웠을 것이다. 끊으려 해도 끊기 힘들었던 담배처럼 그녀에게 도시의 삶은 빈곤했고 내내 험난했다. 영화 끝 도일은 엄마의 병상 곁에서 우는 그녀에게 “괜찮아”라고 말한다. 마치 마침표 같은 짧은 한 마디로 영화가 끝나는데, 영화는 도일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기까지의 긴 여정 같다. 

  영화의 중반 쯤, 엄마가 암이 재발해 병상에 눕게 되자 도일은 엄마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말한다.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도일의 말에 엄마는 “이만 하면 됐다.”며 위로한다. 이렇게라도 살려고 하는 게, 속절없이 가버리는 것보다 낫다며 ‘살아보려는’ 도일을 응원한다. 영화 내내 도일에게 이어진 선택과 고난의 시간들은 곧 ‘잘’ 한번 살아보겠다는 투쟁의 시간이었다. 그는 그 시간동안 순영의 굴곡진 삶을 ‘괜찮다’며 어깨로 품을 정도로 자랐고, ‘잘 살아보자’는 말에서 ‘잘’을 떼어버릴 정도로 자랐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잘’이라는 말에 들어있는 기준들이 얼마나 많은가. 도일은 그런 ‘잘’이라는 말을 떼어내고 자신이 선택한 순영과 예준이와의 ‘괜찮은’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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