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코로나 펜데믹 상황하에 새롭게 나타나는 사회 문제를 향한 주디스 버틀러의 시각과 철학이 담긴 책
굉장히 유익하게 읽었다. 특히나, 요 근래 십 년간 대형 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던 한국이었기에 이 책을 읽으며 많이 공감하게 되는 점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성도 하게 되는 지점이 많았다. 인상 깊은 구절이 많아 여기저기 메모해가며 읽었다. 내가 여태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의제들—예를 들면 애도는 죽은 자에게 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이에게 하면 모독이 되는 것, 나의 삶이 어느 정도는 내 노력으로 수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돌봄에 대해서는 꾸준히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이 책의 작가처럼 깊이 있게 오랜 시간 생각하여 어떤 내면적인 결과를 도출해내지는 못했었다. 돌봄은 가정, 특히 여성에게 국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로서 국가가 그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돌봄을 가정의 ‘여성’에게 맡겨왔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지금 하나둘 튀어나오고 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값싼 노동력을 지닌 외국인 노동자에게 맡기거나, 일단 결혼하고 애를 낳고 보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다.
3부와 4부에 걸쳐나온 죽음과 애도에 대한 장은 가장 최근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십 년도 넘지 않아 다시 이런 참사가 반복될 수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안타깝고 슬프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진상규명과 조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유가족과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들도 계속해서 주시해나가야 할 것이다.
‘나의 삶’이라는 표현은 사실 두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는 단수이자 대체할 수 없는 삶,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 체계 및 네트워크와 공유하고 있는 삶이다. 살기 위해서 나는 살아가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존재들을 요한다. 즉, 나는 그것들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바는 이 삶은 내가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리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전에 이미 여러 다른 존재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타자들은 나보다 앞서 존재하며, 어느 정도는 나를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보여주는 초기 효과들, 말하자면 사랑의 침범 작용은 결국 ‘나’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게 될 이 사람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나’는 타자들의 지지와 그들과의 동행이 없이는, 삶의 과정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들이 의존하고 있고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기제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p 75-76
우리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경제를 연다. 혹은 계속 경제가 활성화된 상태로 둔다. 하지만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은 경제를 재개함에 따라 삶이 폐기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이들이자, 자신의 일이 다른 노동자에 의해 대체 가능해지는 이들이자, 자신의 생명이 단수의 귀중한 생명으로서 여겨지지 않는 이들인 것이다. 달리 말해, 펜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바로 그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폐기 가능성과 대체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경제의 건실함은 노동자의 건강보다 중요하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오래된 모순은 펜데믹의 상황하에서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p. 88
사회적 거리두기는 일종의 특권이다. 모든 이들이 그러한 공간적 환경조건을 만들 수 없다. p. 88
어떤 삶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죽음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와 다른 삶들을 보호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아니 비용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p.95
즉, 나의 행동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비록 우리가 분명 별개의 존재일지라도 이와 같은 상호 연루의 관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상호의존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형태의 상호의존성을, 즉 급진적 평등의 이상을 가장 명확하게 체현하는 상호의존성을 찾아내고 만들어내고자 집단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p.140-141
누구의 죽음이 명명되지도 못한 채 조용히 계산되고 있는가? 그러한 경우에 사회적 불평등은 죽음의 정치의 폭력과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p.145
의기양양한 공리주의란 그저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p.148
폐기 가능성이라는 감각을 온몸을 통해 느끼며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 어떤 인정도 없이 죽어서 지구를 떠날 수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다른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확신, 혹은 오히려 세계가, 아니 경제가, 어떤 이들의 생명은 보호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은 보호하지 않도록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팬데믹 급증 이후 어떤 이들은 분명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면서도 경제는 재개되고, 결국 폐기 가능한 이들의 계급이 식별되고 만들어진다. 이는 실로 시장의 계산 와중에 나타난 파시즘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p.156-157
“부정적인 것들에 신경 쓰지 말자!” 그러나 우리의 책무는 주변에 팽배한 상실의 감각을 애도와 요구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엄청난 수준의 상실을 애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방향 상실에 대한 전지구적 차원의 구조화의 필요성을 요구하면서 당신이 그 이름을 모르는 이의 상실을, 당신이 그의 언어를 모르는 이의 상실을,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먼 거리에 살고 있는 이의 상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망자를 알 필요는 없다. 그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그 삶에 관한 모든 세부사항을 알 필요는 없다. 세계에 소속될 권리는 익명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덜 의무적이기도 하다. 대중 담론에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단명한 삶, 더 살 수 있었을 삶이다. 이와 반대로 노인들은 어차피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노인 외의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가?). 망자의 나이가 어떻든 그 사람의 가치는 이제 다른 이들의 삶 속으로 전이된다. 즉, 일종의 합체이자 살아 있는 메아리, 계속 살아가야 할 이들을 변화시키는 활성화된 상처 혹은 흔적이 되는 인정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 내가 고통받지 않았던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하여 그의 고통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162
나는 우리가 오직 죽은 이들에게만 애도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애도 가능성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체에, 즉 현재는 걸어 다니고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제대로 된 기념이나 항의도 할 수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미 부착되어 있는 삶의 한 특성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미 그들이 때 이른 폭력적인 죽음의 희생양이 될 것을, 혹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