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빛과 멜로디>
한 사람의 작은 호의가 한 사람을 살리는 연쇄작용을 담은 따뜻한 이야기
책을 다 읽고 나서 지난 달 읽은 주디스 버틀러의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가 생각났다. 2025년의 시작은 반성과 반성, 또 반성의 연속이다. 참사에 마음을 쓴다 말하면서도 언론이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에만 집중할 뿐 그 이면을 바라보지 못했던 무심했던 나에 대한 반성, 조금 더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너무 무기력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모든 고통들에 내가 조금이라도 호의를 베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권은도, 승준도 아닌 승준의 아내 민영이었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변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승준이 분쟁지역의 여성과 인터뷰를 한다는 말에 백 일도 안 된 아기가 있는 집에서는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보며 키울 수 없겠느냐며 역정을 내던 민영은, 그렇게 말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승준에게 소식을 묻고 끝내는 권은의 사진집 북토크에 아기 지유를 안고 찾아가게까지 된다.
권은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면 숨어있던 빛들이 모여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들이 시선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우리가 무심하게 모른 척 고통받는 분쟁지역에 아주 작은 시선이라도 주는 순간, 그것은 빛이 되고 힘이 된다.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래 나는 뉴스를 기피해왔다. 고통스러운 탓이었다. 내 삶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쏟아지는 소식들이 모두 버겁기 그지 없다. 그런 나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안의 힘을 끌어모아, 사랑을 끌어모아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이 그런 용기를 내게 주었다.
지유의 삶을 미리 재단하지 말라고, 지유는 살면서 사랑하고 웃고 마냥 편안한 나날도 맞을 것이며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다양한 감각의 순간도 경험하게 되리란 걸 기억하라고.
반장,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나는 가엾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위험하게 살았고 결국 그 위험을 피하지 못해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그녀는 하고 싶었다.
시리아와 난민 캠프, 심지어 전복된 고무보트에서도 무사했던 살마가 수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활보하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히잡 때문에 다쳤다는 그 말이……
나는 그에게 살마의 엄마 역할은 사양한다고, 남들보다 이르게 엄마의 부재를 겪은 사람들끼리는 끈끈하게 결속할 때가 있다고 웃으며 대답했을 뿐,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어.
살마가 잠꼬대를 시작했어.
살마를 간호하게 되면서, 그러니까 불과 며칠 전에야 나는 살마가 고향 말로 잠꼬대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럴 때면 나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숨소리도 조심하게 돼. 살마가 엄마와 남동생이 사라지거나 죽지 않은 세상에 가 있는 거라면, 그곳에서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남동생과 장난을 치는 중이라면, 나는 그곳을 지켜주고 싶으니까. 허공에 흡수되는 가습기의 저 연기처럼, 왕성히 면적을 확대해갔지만 지금은 형태조차 기억나지 않는 오전의 구름처럼, 눈을 뜬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곳……
죽음만을 생각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 무든 쉽게 잊는 무정하도록 나태한 세상에 타전하고 싶다는 마음, 그들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 나를 살게 한 카메라로……
집으로 돌아갈 때도 거리 여기저기에 빛의 조각들이 많이 널려 있어서 아, 오늘의 꿈은 운좋게도 길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조각들은 공습 때 깨진 유리의 파편들일 뿐이었어요.
게리는 아버지가 군인으로서 범한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뒤에 조작되고 의도된 아버지의 무지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너는 아주 작은 아기로 태어나겠지만 수십억 년을 사다가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니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의 까마득한 조상이기도 한 셈이지.
그들은 뭐랄까, 사랑을 생략한 채 이별을 겪은 연인 같았다.
내게도 그런 사랑에 대해 들을 자격이 있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에 공감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그 모든 순간에 내가 죽었다면 그들 중 누군가는 살았을지 모른다, 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생각들이 반복되면서 그가 겪은 수많은 죽음은 그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이 되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녀였지만, 그녀는 그들의 눈에도 그녀의 한순간이 포착되어 그들 각자의 기억 속 필름에 기록되리란 걸 알 수 있엇다.
그것을 안다는 것이, 그녀는 좋았다.
삶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을 대신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
그래도 어쩌겠어요, 누군가는 그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보여줘야죠. 영상이든 사진이든 그걸 본 사람들이 그 순간에만 깜짝 놀라거나 아파할 뿐,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린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