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컴퓨터하러 모텔 갈래요?

12-1.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by 지지

오래 알고 지내던 '남사친'이 있었다. 말 그대로 남자 사람 친구. 대학원에서 알게 된 그는 나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던 그는 마찬가지로 자취하던 나와 집이 가까웠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함께 맛집도 가고, 장 보러 이마트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경복궁에 한복 입고 놀러가기도 했다. 그 순간들 중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 오죽하면 경복궁에서 "사진 찍어드릴까요?" 묻는 누군가의 말에 "아니요.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을까.


하지만 그와 알고 지내면서 편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동성 친구와는 또 다른 든든함. 늘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내가 앞으로 나서야 하고 부축해야 했던 때와 달리, 그와 있을 때는 내가 부축을 받을 수 있고 적절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같이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았던 것 같다. 내 지인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남자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말했다. 그래도 나는 무심하게 넘겼다. 내가 초장부터 그에게 "대학원에 온 이유는 친구를 사귀러 왔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 관계가 변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주변에서 하나 둘 나와 절친한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나는 공허해졌다. 나를 두고 친구들이 인생의 다음 스텝을 넘어가는구나. 우리의 생활환경이 달라지겠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내게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반려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서로에게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줄 수 잇는 사람이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고. 그런 시기에 지방에 내려가 연락이 끊겼던 남사친, 그러니까 M이 다시 인스타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내가 스토리에 무언가를 올리면 그가 거기에 반응을 해오는 식이었다.


가벼운 스몰토크에서 시작해서 시시껄렁한 이야기. 왜 이야기를 이어가는지 알 수 없는 지루한 물음과 한탄의 반복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 뭐해요? / ㅋㅋ아 ㅠㅠ / 출근 힘들다 / 집 보내줘요) 가끔 내가 깊은 고민이 생겨 정말 힘들다고 말하면 M은 내가 더 힘들다는 식으로 장난스럽게 화제를 넘어갔다. 재미없는 대화였다. 몇 번 내가 무시하면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중 내가 올린 코바늘 원데이 클래스 일행을 구하는 스토리에 그가 반응하면서, 우리는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지방에 있던 그는 그 원데이클래스를 위해 하루 친구의 집에서 자고 그 다음날 나를 만나 원데이 클래스를 듣고 밥 먹고 놀다가 기차 타고 돌아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너 좋아하는 게 맞네, 맞네 수선을 떨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사람 마음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아무 생각도 없던 그 남사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그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M이 자연스럽게 나를 배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M에게 마음을 열어볼 수 있는 계기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추석 연휴, 마침 그 지방에 외가 친가가 다 있어 내려가게 된 나는 하루 일정을 빼서 M을 만나기로 했다. 장난스럽게 놀러가면 밥 사달라고 말한 것도 있고,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우선 첫 번째. 남들이 추리하는 것 말고, 정말 M이 나를 좋아하는 건지. 그리고 두 번째. 나는 M을 이성으로 볼 수 있는지. 내가 지금은 M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M은 내 장애도 알고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서로 알아가는 데 있어 더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그래서일까. 지방에 내려가기 전 나는 부산스러웠다. 우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거울을 보니 갑자기 내 머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르고 보니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심지어 지방에 내려가서는 옷이 더러워지는 바람에 원래 입었던 내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어야 했다. 가방도 없어서 사촌동생의 에코백을 빌려서 메고 나갔는데,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동생의 에코백은 일반적인 사이즈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 내 모습이 초라하다고 느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서 M을 만나자마자... 나는 M에게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마음이 쏙 들어갔다.


초록색 피케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쪼리를 신은 M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도저히 이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한 대화들도 머릿속에 지나갔다. 영양가 없이 징징대고 메신저를 이어가는 것 그 이상의 아무것도 없던 대화들. 내가 준 생일선물, 소고기를 엄마가 구워줘서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 퇴근하고 나면 힘들어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방증하듯 톡 튀어나온 배까지. M의 모든 것이 나에게 이성의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그냥 밥 먹고,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M은 근사한 걸 사주고 싶었던 것인지 그 지방에만 있는 브랜드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고, 나는 그에게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런치세트를 먹었다. 그마저도 워낙 소식하는 터라 잘 들어가지 않아 내 앞의 M이 다 먹었다. 식사 후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작년 추석은 이상고온으로 여름처럼 날이 뜨겁고 더웠다. 그 지방은 더했다. 나는 안에서 놀 수 있는 곳을 찾자고 제안하며 만화카페를 떠올렸다. 그런데 M이 아니면요, 하면서 슥슥 어플을 켜서 보여준 곳은 모텔이었다.


갑자기 모텔?


이게 무슨 개수작인가 싶으실 거다. 근데 나는 M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었기에 위화감만 감지했을 뿐 그가 다른 의도가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M은 모텔에 컴퓨터가 있는 것을 보여주며 자기 친구들과 가서 게임하고 쉬고 놀았었던 경험을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모텔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친구와 모텔을 대관해서 케이크를 먹은 경험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 그 친구는 동성친구였다. M은 달랐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그는 이성이었다. 나는 할 게 없으면 자리를 파하자 했고, M은 그럼 좀 걷자고 말했다. 그렇게 걷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고, 만화카페에 갔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서울에 돌아와 친구에게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 친구는 기겁했다.


야! 그거 스킨십하자는 뜻이잖아!


몰랐다.


전혀 몰랐다. 내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었다지만 지방에 PC방이 없을 리도 없는데 왜 나는 그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 자리에서 좀 더 단호하고 불쾌하다고 말하지 못한 것도 후회됐다. 그 다음으로 밀려드는 것은 배신감이었다. 나는 M을 친구로 여겼다.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냈다. 그는 내 장애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내 이성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잠깐 품어보려 했던 호감이 싸늘하게 휘발됨과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평가절하가 시작되었다.


나를 그런 가벼운 여자로 본 건가?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관계 정립이 먼저가 아닌가?

아니면 나는 장애인이니까, 시장에서 말하는 가치가 떨어지는 하자물건이니까 갖고 놀기만 하겠다는 건가?


나는 내 장애, 내 몸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러게 왜 기대를 가졌어? 왜 허튼 생각을 가졌어. 넌 사랑 받을 수 없어. 이전부터 있던 부정적 생각들이 강화되었다. M과 함께 놀았던 즐거운 시간들이 모두 더럽게 느껴졌다.


(12-2로 이어집니다.)

keyword
이전 16화말이 안 통하는 자폐인과는 어떻게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