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인해 멈췄을 엄마와 아빠의 시간
커피맛은,
제대로 느꼈을까
카페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던 중, 유모차에 앉아 엄마와 함께 들어오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생글생글 웃는 게 이쁜 여자아이었다. 카페의 따뜻한 온기에 아이는 금방 잠이 들었고, 엄마는 주문한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조심스레 즐기기 시작했다.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엄마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잠에서 깬 아이는 들어올 때의 웃음 대신 울음을 터뜨렸고, 그와 동시에 엄마 역시 분주해졌기 때문이다. 손에 들렸던 커피는 그제야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아이는 그 틈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금방 그칠 것 같았던 아이의 울음은 더욱 커졌고, 카페의 손님들에게 방해가 될까 엄마는 짐을 챙겨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카페의 문을 열었다. 반 이상 남은 커피는 그대로 남겨둔 채.
그러고 보니, 엄마는 커피를 테이블에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엄마의 시간이 길지 않을거란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 경기도 군포에 살았을 때 엄마와 내가 가장 많이 갔던 곳은 동네 놀이터도, 친구분들 옆자리도 아니었단다. '한 대만, 아이 한 대만 더 보자 응?' 기차가 지나갈 때면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단 말이야'라면서 한 대를 더, 지금도 종종 보이는 그래서 더 반가운 빨간색 전철이 지나가면 '이번엔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가 보고 싶단 말이야'라면서 또 한 대를. 그렇게 나는 엄마와 오랜 시간 역 근처에 머물렀다고 한다.
아이와 엄마가 떠난 뒤, 열차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났다. 아들과 함께한 시간이니까 -라는 말로, 덕분에 커피 한 모금을 마셨으니까 -라는 말로 웃으며 넘길 '엄마들'이지만 나로 인해 멈췄을지 모르는 엄마의 시간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놓쳤을 아빠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로 인해 멈췄을 두 사람의 시간이
흑백이라는 시작점을 통해 기존의 정해진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것(色)을 입혀보고 그렇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의미를 찾아(索)가는 것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엄마의 시간'은 다른 맥락에서의 '흑백'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흑백이 된 이후로 우리는 원하는 색을 자유롭게 채워 넣을 수 있지만, 엄마의 시간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수 있다는 점이 많이 다르다. 그 누군가에는 카페에서 울먹이던 아이도, 기차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던 아이도 모두 포함되어 있겠지.
서른두살이 되고 나니, 엄마와 아빠의 시간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나도 우리 아빠처럼 할 수 있을까? 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고 답을 구하는 친구들이 내 주변에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엄마의 시간에 포함되어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한 사람의 아빠가 되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시간 일부를 누군가에게 자유롭게 놓아줄 준비도.
그 날, 나는 버스 대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놓아준, 엄마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종착역에 내린 나는, 울타리 너머로 쉼 없이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봤다. 그때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엄마의 시간이 시작된 후, 엄마는 나로 인해 어떤 색을 지니게 되었을까. 언젠가 아빠가 될 나의 흑백은 어떤 색으로 채워질까.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엄마와 아빠의 시간.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시작하게 될 시간. 그 날 아이의 울음과 1호선 열차는 둘 사이의 묘한 경계선에 서있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엄마들은 분명 '너로 인해'라고 말할 것이다
너로 인해 생긴 시간들, 너로 인해 함께한 시간들, 너로 인해 만들어진 순간들 등
그리고 놓쳤다는 표현과 빼앗겼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로 인해 멈췄을 시간과 놓쳤을 시간에 대해
엄마의 시간과 아빠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나의 시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