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온전히집중할수 있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이유
창업 도전과 실패 후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며 배울 수 있었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되면 어쩌지, 라는 고민을 매일 같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과 판단은 주어진 시간을 모두 ‘배움'으로 채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업무 시간과 업무 외 시간의 구분을 불명확하게 만든다는 단점도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다음 기능에 대한 고민, 정리 등을 계속했고, 집에 도착해서 잠깐의 쉬는 시간 뒤 자연스레 노트북을 활용해 업무를 하게 되었다. 기획자이자 PM으로 일하며 나는 이 일이 정말 매력적이고 즐겁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팀원들과 함께 만든 기능이고 서비스지만, 나의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피드백을 받거나, 지표 상으로 드러날 때의 행복은 이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거움과 별개로 나는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번아웃에 빠지고 말았다. 즐거운 일에도, 번아웃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번아웃에 빠지자 나와의 아슬아슬한 만남이 이어졌다. 정확히는 나라는 사람의 경쟁력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지 않고, 나라는 사람 스스로를 갉아먹는 상황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잘하는 것보다 부족한 점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 배우는 과정이며 더 나은 사람이자 기획자가 되기 위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밀어내 버렸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과 답이 늘어났고 업무에 대한 거부감은 물론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대로는 나는 물론 팀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명확한 ‘끊음'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주말 포함 앞 뒤로 하루씩 휴가를 냈다. 캘린더를 살펴보며, 신규 서비스 론칭 등 쉼 없이 달려온 덕에 3개월 간 단 하루도 휴가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괜히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가 첫날,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씩 총 4일을 여유롭게 보내면 자연스레 번아웃이 없어질 거라고,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휴가 이틀 차로 접어들며 내가 업무 외 시간에 몰입해 무언가를 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얼마 전 다른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기획자 형이 보낸 메시지 내용이 떠올랐다. “너는 대체 언제 쉬니?”라는 말이었다. 하고 싶었고 재미있게 참여 중인 프로젝트를 떠올리고 진행하는 게, 쉼 이상으로 다가왔기에 지금까지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쉬는 게 꼭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늦잠을 자고, 내일은 못 봤던 영화 한 편을 보고, 다 적지 못한 글과 편집하다만 사진을 만져야지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어제 다 하지 못한 업무가 떠올랐다. '이것만, 여기까지만' 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하나에 다다르면 닿아야 할 무언가가 나타났고, 다시 달려 도착하면 또 다른 것들이 내게 쉼 없이 들이닥쳤다. 적당한 때에 끊고, 이어달려야 했는데 그 '이음'의 과정을 나는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스스로가 쉼을 포기하고 밀어내고 있다는 아찔함에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번아웃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우선, 업무와 관련된 것들을 배제한 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작성했다. 처음엔 별도 기준을 잡지 않고, 단순히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글쓰기, 출사(필름 카메라), 여행, 걷기, 커피 등 다양한 키워드가 노트 위에 옮겨져 있었다. 이어서 각 키워드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작성했는데, 이번에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준에 맞추기로 했다. 예를 들어 필름 카메라면 출사를 가고 싶은 장소를 덧붙이고, 그 장소를 미리 검색해보는 식이었다. 또, 구체적으로 작성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했던 날을 함께 적었다. 필름 카메라 출사는 1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키워드,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한 날을 작성하니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과 의욕이 생겼다. 다만, 항목이 꽤 많았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각 키워드별 중요도를 정한 뒤, 키워드에 따라 작성한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매겼다. 그리고 우선순위가 높은 항목들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을 포함시켰다. 필름 카메라 출사는 한 달에 한 번 하기!, 이번 달 출사는 부암동으로 2주 뒤 반차를 낸 후 평일 오후에! 와 같이 더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을, 우선순위에 따라 작성했을 뿐인데 그 효과는 꽤 컸다. 무엇보다 업무를 하는 나와, 업무를 하지 않는 나를 조금 더 명확하게 분리해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번아웃을 경험한 기획자들 또는 선배들에게 물어도, 좋아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답이 많았는데 직접 작성해보니 그 이유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번 주 업무를 잘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 출사를 나가야지. 출사에서 찍은 사진과 관찰한 내용으로 그다음 주에는 에세이 한 편을 작성해야지 등 하고 싶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 항목들 덕분에 나는 업무 외적인 기대를 더 다채롭게 가질 수 있었다. 그때 작성한 항목 중, ‘글쓰기’는 지금까지도 업무, 업무 외적으로 가장 큰 도움이 된 행동 중 하나가 되었고, 2016년에는 브런치 북 1회 금상을 수상하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배운 또 한 가지가 있다면, ‘나'에게 집중하는 방법이다. 번아웃에 빠져 휴가를 보내던 중, 몇몇 선배와 지인들에게 번아웃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물으며 내가 계속 언급했던 키워드는 ‘회사와 업무'였다. 나로 인해, 나 때문에 등 내가 연관된 프로젝트나 서비스에 영향을 주면 어쩌지- 라는 걱정으로 질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지인들은 ‘너를 먼저 생각해'라는 말을 먼저 건넸다.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올바른 출발점을 찾는 계기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단순히 번아웃을 빠져나갈 노력만 했을 텐데, 덕분에 나 자신에 집중해 상황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몰입할 수 있는 것을 다시 정리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출발점도 만들 수 있었다. 그때 작성한 노트는 지금도 내가 업무에 지치거나 치일 때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 줌과 동시에 내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 뒤로도 나는 번아웃에 빠졌다. 번아웃 자체를 피해 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업무 특성상 아직 내겐 버거운 일이 많기에 번아웃에 빠졌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채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앞선 노력으로 인해 그 시간과 횟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휴지(休止)라는 말이 있다. 연주를 하는 도중에 일제히 흐름을 멈추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 쉼이 이전과 다음을 위한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끊어짐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하루도, 우리 시간의 흐름도 연주와 휴지가 조화롭게 이뤄져야 하기에 업무를 하는 내가 아닌, 나를 위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시간에 인색하지 않았으면 한다. 꼭 번아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기획자가 되기 전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더 좋은 나라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퇴근이 일하는 장소를 옮기는 시간이 아닌, 다른 곳에 맡겨졌던 내 시간을 돌려받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경계를 더 명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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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7월, 제 첫 도서가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10년 차 IT 기획자의 노트’입니다. 브런치 '기획자가 일하는 방법'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수 없이 일하는 어려움을 저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분들이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9개 노트(기록)를 바탕으로 기획과 PM의 주요 업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