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단계는 새 문서부터 만들지 않기!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불확실성은 늘 따라다녔지만 두렵다기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동기로 다가왔다. 오히려 내가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사수이자 팀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창업부터 두 번째 스타트업까지 홀로 기획과 프로젝트 관리 역할을 하던 내게 부사수가 생긴 기쁨도 잠시, 뭐든지 배우고 소화해 내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친구가 되려 나로 인해 실망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서비스 이해와 더불어 본인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소개서를 작성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한 번 해볼게요. 라며 자신 있게 자리로 돌아간 팀원이 점심시간 시작을 넘어서까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어 슬쩍 확인해봤다. 파워포인트를 실행하곤 제목까지 작성 한 뒤 난처한 표정으로 모니터와 나를 한 번씩 보고 있었다. 포트폴리오와 함께 첨부했던 여러 제안서가 꽤 논리적이고 촘촘하게 작성되어 있던 터라 나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2시간 동안 제목밖에 작성하지 못한 상황이 아쉽다는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는 본인이 만들거나 담당했던, 그러니까 이미 익숙한 상황에서 소개서나 제안서 등을 작성해 어렵지 않게 느껴졌는데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려니 생각한 내용들이 뒤엉켜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순서가 섞여도 좋으니 하나씩 꺼내보자고 했다. 나는 태블릿으로 그 내용들을 일단 하나씩 입력하곤 적잖이 놀랐다. 이미 꽤 구체적인 내용과 범위까지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평소 제안서와 같은 문서를 작성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물었다.
스타트업 특성상, 여러 업무를 처리해야 하다 보니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준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일단 문서를 생성해 생각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살을 붙여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태블릿으로 작성한, 팀원이 내게 하나씩 꺼낸 이야기를 내용의 흐름에 따라 재배치해 다시 보여줬다. 머릿속엔 이미 다 있었던 내용이지만 이를 꺼내 미리 살펴보고 확인하는 과정만 더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함께 건넸다.
사실 나도 창업 때 많이 놓쳤던 내용이었다. 머릿속으로 이렇게 작성하면 되겠다며 파워포인트 등 적합한 문서 제작 툴을 켜곤 바로 작성하는 것. 미팅 내용 등과 같이 짧은 내용을 집중해서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설득, 소개 등 일정 목표가 있고 길이가 짧지 않은 문서라면 동일한 방법으로 작성할 때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문서 작성을 위한 사전 준비가 꼭 필요하고, 같은 어려움을 겪는 팀원과의 대화를 계기로 제안서 등의 문서를 작성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면 좋을지 정리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문서를 제작할 때 무턱대고 시작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은 물론, ‘06. 모두를 위한 업무 매뉴얼 작성법’을 통해 정리한 ‘업무 매뉴얼'에도 포함해 동일한 문서 작성을 자주 하지 않는 팀원에게도 도움이 되는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란 판단도 있었다.
인턴 시절, 같은 상황에서 지금까지 유일한 사수가 내게 말해준 건 문서를 먼저 생성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서가 열리는 순간, 무언가 작성하고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배우고도 창업 때 습관처럼 문서를 먼저 생성했던 나와, 2시간 넘게 슬라이드에 제목만 작성했던 둘의 모습을 떠올리니 이 내용이 꼭 첫 번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를 생성하는 순간 무언가 형식에 맞춰 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설 수 있고, 템플릿 등 디자인 작업을 하는 등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제안서라는 이유로 파워포인트를 켜고 열심히 내용을 입력했는데, 정부 기관에 전달할 목적의 문서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해 마지막에 하루 정도를 더 써 한글 파일로 옮긴 경험이 있는 내겐 꽤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문서는 나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써내려 가는 공간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서를 먼저 생성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용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자료 조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료 조사는 필요하지만, 효율적이지 않은 리서치는 투자 대비 효율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정해진 기준에 따라 내용을 찾지 않으면, 자료를 찾아보며 방향이 틀어질 수 있고,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우리가 웹서핑을 하다 보면 원래 찾으려는 내용 외 더 많은 내용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작게는 문서를 누가 보느냐에 따라, 크게는 문서를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확인해야 할 자료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문서를 우리가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정리와 정의를 꼭 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이 내용을 보게 될 사람,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의 특성(정부기관과 같은 스타트업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메일이나 미팅 등을 통해 상호 간 논의된 내용이 있는지, 꼭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등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이런 내용들은 문서를 작성하며 목적을 잊지 않게 해주는 최소한의 기준이 될 수 있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시간을 투자해 내용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공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 우리 서비스가 특정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서비스에 대한 소개 내용을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문서를 먼저 열어 작성을 시작하면 서비스 자체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문서를 읽는 사람이 기능 단위 소개보다 산업 구조 등 여러 이유로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다면 어떨까? 내용과 방향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제안서 작성 목적과 주변 상황에 대한 정리가 끝났다면, 바로 구체적인 내용 작성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내부 피드백을 거치는 것이 좋다. 작성 중 내용을 수정하는 것보다 기본 뼈대를 튼튼히 만들어 놓는 것이 시간을 아끼면서 효율적으로 문서를 제작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피드백까지 받았다면, 포스트잇 등에 작성 후 업무 기간 동안 잘 보이는 곳에 부착하는 것이 좋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지 않기를 바라지만, 정리를 잘해놓고도 길을 잃는 경험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이제 합법적으로 사무실을 벗어날 시간이다. 사무실 근처 마음에 드는, 자주 찾는 카페에 펜과 노트 하나를 들고 가보자. 그리고 어떤 내용이 필요할지 하나씩 작성해보자. 정확히는 문서에 들어갈 세부 내용들의 기준이 될 목차를 작성하는 시간이다. 처음엔 한 줄씩 필요한 내용을 작성했지만, 최근에는 질문으로 작성하는 방법도 함께 활용하고 있다. 문제 해결에 대한 내용이라면, ‘문제 해결 방법’이라고 적는 것보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과 같이 작성했을 때 상세 내용 작성 시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가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이유, 문제 해결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할 수 있는 문제 등 파생되는 내용들을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목차의 성격이 강하지만, 질문으로 작성한다는 가정하에 키워드 형식으로 답을 함께 작성하는 것으로 이 단계를 마무리할 수 있다.
이제 자리로 돌아와 작성한 내용을 차례대로 읽어볼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논리와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작성된 목차 성격의 항목은 스스로 읽었을 때 어색함이 없다. 살을 붙이지 않은 상태라도 억지스럽게 들어간 항목은 없는지 천천히,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듯(발표하듯) 쭉 읽어보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수정되는 내용도 꽤 있다.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 서면, 항목에 맞는 내용을 넣기 위한 자료를 찾고 정리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문서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써내려 가는 공간이기에 아직 생성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질문에 대한 답을 구체적으로 작성한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찾아보자. 이때 자료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것이 좋다. 팀에서 자주 들여다보는 데이터(지표), 우선순위로 설정한 항목 등 내부에서만 알 수 있는 자료를 먼저 확인 후, 추가로 필요한 내용을 찾아보는 방법이다. 또 자료를 정리할 땐 출처, 발행일을 함께 표기하며 내용을 미리 요약하는 것이 좋고, 차트 등 별도 디자인 작업이 필요한 내용은 따로 구분하는 것이 좋다. 당장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라면 일단 건너뛰며 전체를 훑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한 목차(질문)에 따른 자료 정리가 끝났다면 이제 적합한 툴을 선택해 새 문서를 생성할 단계이다. 목차 별 요약한 내용을 하나씩 추가하며 문서 분량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02. 한 번의 실수는 배움이 되고, 두 번의 실수는 실력이 된다’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비스 입장에서 잔뜩 작성해 꽤 많은 분량을 문서에 포함시킨 적이 있다. 이는 미팅 때 핵심 내용을 집중적으로 전달하는데 시간을 쓰는 대신 내용 자체를 전반적으로 다시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문서에 찾은 내용을 옮겨, 지나치게 길어지진 않는지 확인 후, 자료의 우선순위를 파악해 분량을 조절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덜어내는 과정을 거칠수록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창업 초기 만들었던 제안서는 여러 미팅을 거치며 기존 1/3 수준으로 내용이 줄어들었다. 분량까지 정해졌다면, 앞서 포스트잇에 작성한 작성 목적, 읽는 사람 등에 대한 기준을 계속 확인하며 구체화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문서가 완성되었다면 내부에서 먼저 리뷰를 진행하며 피드백을 받는 것이 좋다. 다만, 배경을 잘 모를 수 있는 참여자들을 위해 문서 작성 이유 등을 먼저 전달하고 미팅 전 문서를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기획자에게 다양한 성격의 문서 작성은 빈도가 높은 업무 중 하나다. 업무 관점이라곤 하지만 문서 작성은 하나의 글쓰기와 같고 이는 생각보다 많은 고민과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고, 여전히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조금 더 명확해진 사실이 있다면 잘 쓰는 것보다 중요한 건 효율적인 방법과 단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며 하나의 업무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으니 각자가 문서에 작성한 내용과 별개로 어떤 방법으로 작성하고 있는지, 비효율적인 단계는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문서 작성이 조금이나마 쉬워지고 재밌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23년 07월, 제 첫 도서가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10년 차 IT 기획자의 노트’입니다. 브런치 '기획자가 일하는 방법'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수 없이 일하는 어려움을 저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분들이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9개 노트(기록)를 바탕으로 기획과 PM의 주요 업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