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지 3주가 흘렀다. 나는 현재 굉장히 어중간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자기 개발을 열심히 해 재취업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이때다 싶어 제주도로 떠난 것도 아니다. 간간이 알바를 하면서 지내고 있을 뿐이다. 어제는 새벽부터 일어나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 촬영 알바를 다녀왔으며,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설렁설렁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 내 일상을 온도로 환산하면 36도쯤 되는 것 같다. 미지근하다.
나는 자신한테 그리 철저하지 않다. 그래서 머릿 속 할일을 못 끝낼 때가 많다. 사실 게으름의 끝판왕이다. 게으르지만 퇴사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백수가 아닌 직장인일 때, 퇴근 후 하고 싶었던 것들이다. 스트레스 관리용이 아니라 즐겁게 운동하고 싶었고, 카페에서 느긋이 독서와 글쓰기도 하고 싶었다. 화양연화도 다시 보고 싶었다. 역량 강화를 위한 여러 교육 역시 듣고 싶었다. 퇴사 전 내 열정은 백도 씨 가까이 되었던 것 같다. 마치 전역 직전처럼 말이다.
사람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오늘 눈을 뜨고 11시라는 시간을 보면서 든 생각은 ‘퇴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조금 설렁설렁해도 되잖아’였다. 나는 합리화를 잘한다. 정신 좀 차리고 나서는 일찍 일어날걸 이라고 생각하면서 쉼이 그리 필요한 상태였나 점검해본다. 내가 퇴사한 이유가 번아웃은 아니었기에 쉼이 그리 필요한 상태는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참고로 나는 자기 객관화도 어느 정도 된다. 내가 게으른 것도 알고, 오늘 역시 게으름 피운 걸 충분히 인지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자괴감이 몰려온다. 합당한 기분이다. 더 깊이 내려가본다. 서른 살에 이룬 것도 별로 없는 백수쟁이.
사실 나는 진지병에 걸려있다. 종종 진지하고 디프레스한 생각과 기분을 과하게 즐기기도 한다. 디프레스한 기분(감정은 아니다)에 깊이 빠져들면 속에서 뭔가 나오기도 하고 끄적여지기도 해서다. 이것들은 참 좋은 재료다. 이 재료로 만든 게 다른 이들의 공감과 위로를 이끌어 낼 수도 있기도 하다. 참 역설적이다.
한편 이것도 기만적인 건 아닐까 싶다. 지금 백수이긴 하나 나는 일할 곳이 결정되어 있다. 또, 그곳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에겐 내 처지와 이 기분이 사치일 수도, 하찮을 수도 있다. 또 묻는다. 내가 일부러 자조하고, 자조하는 건 아닌지, 사실 이 정서를 즐기는 건 아닌지. 아, 사회에서 여러 가면을 쓰다보니 가끔 이런 문제도 생긴다. 가면이 나인건지 내가 가면인건지 헷갈린다.
슬슬 생각의 꼬리를 끊는다. 디프레스한 상태가 더 지속되면 내 하루가 망쳐질 것을 안다. 팩트로 어느 정도 나를 때린 후엔 슬슬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다. 심신이 환기된다. 어느샌가 오후가 다 흘렀나 보다. 하늘에 자줏빛 노을이 보인다. 나는 이 매직 아워를 사랑한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노을 물든 거리를 걷다보면 디프레스한 내 머릿속은 자줏빛으로 물든다. 시시각각 빛이 변하는 그 시간은 참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낭만적이면서도 아주 짧다. 각자의 하루가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