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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방 고라니 Nov 10. 2021

시간을 가지자

권태의 징후

“나 오늘 어때?” 광안리로 향하는 지하철에 타자마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올림머리를 하고 파스텔 톤의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올림머리가 취향이라는 내 말을 듣고 난 뒤로 그녀는 종종 특별한 날, 그러니까 1주년이나 생일 등에 올림머리를 하곤 했다. 그녀의 반듯한 이마와 잘생긴 콧대가 도드라져 보였고, 이마와 귀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난 잔머리가 돋보였다. 그녀는 원래 미인은 잔머리가 많다고 열심히 주장하면서 가끔씩 자신의 잔머리를 어필하곤 했다. “응, 엄청 예뻐” 내 말을 듣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날은 우리가 헤어지기로 한 날이었다.



사귄지 2년 정도 되는 어느 날, 그녀는 시간을 갖자는 말을 통화음으로 건넸다. 여느 때와 비슷하게 우리는 주말에 긴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250km가 떨어진 서로 다른 도시에 있었고, 2년 넘게 장거리 연애 중이었다. 야근도 잦고 기숙사에서 살던 나는 그녀와 통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채우지 못한 사랑의 감정을 주말에 몰아서 채우는 것은 우리의 공식적인 주말 일정이었다. 주말 통화에서 그녀는 힘들다는 말을 많이 했고, 나는 그 말을 주말이 돌아올 때마다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뒤에 한마디가 더해졌다. 우리 시간을 가지자.



그녀는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주목받긴 싫어했지만 관심받는 것을 좋아했고, 관심받을수록 사랑스러운 모습이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미술을 좋아해서 일러스트와 캘리그래피를 즐겨 그렸고, 열역학, 유체역학 등의 전공책을 들고 다니는 특이한 공대생이었다. 낯을 가리고 조금 소심한 그녀는 사람과 천천히 깊게 사귀었고 덕분에 그녀를 안 지 4년 만에 나는 그녀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나는 모든 것에 둔한 사람이었다. 편식하는 것 없이 뭐든 잘 먹었고 집이 아닌 밖에서 잘 때도 잠을 설치지 않았다. 감정 기복도, 편견도 크게 없어서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류의 한 마디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달랐다. 나는 그녀의 따뜻함과 특별한 섬세함이 좋았고, 그녀는 나의 안정감을 좋아했다.



서로의 다름은 매력적이었고 힘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섬세하고 따뜻한 만큼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우리가 떨어지게 되었을 때 나는 멀리서 그녀의 감정을 채우는 방법에 서툴렀다. 함께 있을 때 표정으로, 말로, 손짓으로 전달했던 사랑의 감정을 통화음으로만 전달하는 것은 어려웠다. 나는 섬세하게 감정을 전달하지 못했다. 당시 직업 군인이었던 나는 휴가를 내지 않으면 타 지역으로 가지 못해 주말에 그녀를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 게다가 퇴근 후에도 계속되는 군생활에 늘 피곤했던 나는 밤늦게 그녀와 통화하면서도 잠들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시간이 늦었네, 그만 자자..."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기 전 30분에서 1시간 남짓한 그녀와의 통화가 숙제처럼 느껴졌다.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숙제였다. 그렇게 사랑의 감정을 확인받고 싶은 그녀와 그녀의 전화를 받고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사는 부산에 내려갈 때면 맥주를 마시면서 그녀의 방에서 함께 잠들었고, 2박 3일 동안 그녀와 붙어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해운대보다는 낭만 가득한 광안리 바다를 좋아했다. 휴가를 나가면 그녀와 광안대교를 보면서 모래사장을 걸었고, 구포역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녀와 시간을 보내다 일터로 복귀하고 나면 그녀의 힘듦을 어느 정도 해결해준 것만 같았다. 우리 관계는 별문제가 없었고 힘든 건 모두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군생활 기간만 잘 버티면 결국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휴가 땐 모든 게 괜찮았으니 말이다.


낭만 가득한 광안리 바다



그녀가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건넨 이후, 우리는 복잡한 시간을 가진 뒤 결국 헤어지기로 했다. 마지막 만남을 가지기로 했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만나러 가려고 휴가를 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해선 그녀가 해준 밥을 남김없이 먹었다. 입대하기 두 시간 전 식사도 맛있게 먹었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계란말이를 먹을 때 살짝 목이 메었는데, 계란말이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녀가 나를 위해 손수 계란을 말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밥을 다 먹고 그녀는 울었다. 나도 왠지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평소 운 적이 거의 없던 나는 말 그대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신기했고, 요동치는 내 감정이 신기했다.



우리는 마지막 데이트를 하러 광안리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했고, 사귀자고 고백한 날의 광안리 데이트처럼 서로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똑같이 밥을 먹고 익숙한 카페를 가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녀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자고 했다. 걸으면서 그녀는 또 울었다. 그녀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더 많이 울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아서 위로했지만 그녀의 눈을 바라보진 않았다. 천천히 한 걸음씩 걸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매번 맥주 4캔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던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번엔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앞에서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안녕, 갈게. 응, 조심히 가.



그녀와 헤어지고 거리로 나오니 늦은 밤이었다. 나는 잘 곳을 찾아 싸구려 모텔에 갔다. 침대에 누워 생각없이 TV를 틀었다. 눈으로 TV를 보면서 우리 이별에 대해, 권태로움에 대해,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설레는 감정이 식고 익숙함과 편안함을 넘어 권태로움을 향해갈 때 그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육체와도 비슷한 걸까 생각했다. 적당히 보기 좋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별을 상황 탓으로, 서로 다름 탓으로 돌렸지만 사실 그게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늙어갔지만, 나는 둔해서 그걸 몰랐을 뿐이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생각이 후회로 물드는 것 같아 이내 멈추고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꾸몄고, 이쁘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의 올림머리가 정말 이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쁘다고 생각했고, 잠들기전 통화하던 때와는 다른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응, 엄청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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