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연다. 외출하기 5분 전, 그때서야 나는 무슨 옷을 입을지 생각한다. 선택지는 많이 있지 않다. 검정 와이드 슬랙스, 그냥 검정 슬랙스, 흑청바지... 조금씩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검고 무채색이다. 내 삶 같다고 생각했다. 무난하게 보이고 싶다. 아니 그것보다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싶다가 맞을 거다. 패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젠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아주 조금은 보인다. 그런 나이다.
요즘 내가 제일 많이 입는 옷은 무신사 앱에서 산 추천 상품들이다. 쇼핑할 때 고르기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가장 많이 팔린 랭킹 상품을 몇 번 클릭해서 보다가 금세 장바구니를 완성했다. 적당한 옷들. 나는 그런 게 좋다. 굳이 옷으로 내 개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고, 눈에 띄고 싶지도 않다. 아, 참고로 그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다. 너무 현란해서도, 너무 뒤떨어져 보여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장에서 옷을 꺼낸다. 스트레이트 핏의 흑청바지에다 회색 집업니트를 입는다. 검정 숏푸퍼를 한 번 더 두르고 스퀘어 토 쉐입의 더비슈즈를 신고 문을 나선다. 거리의 수많은 사람 룩, 완성이다.
누군가는 내게 개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가장 나답게’란 캐치프레이즈를 사방에서 외쳐대는 지금 시대에, 이건 어쩌면 잘못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개성이 없는 것을, 취향이 흐린 것을 좋지 않은 상태로 여기는 듯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좋지않은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태를 꽤 좋아한다. 나는 어느 의견에나 쉽게 맞출 수 있는 내 흐릿한 취향과, 대중적인 즐거움을 진짜로 즐길 수 있는 내 무던함이 좋다. 흐릿하고 무던함으로 쉽게 빚는 편안한 순간들을 나는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
개성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무미건조하게 살고 싶다는 건 아니다. 나는 색으로 보자면 검정-회색 인간이지만 심심하게 살진 않는다. 가끔 설레고, 시답잖은 걱정을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개성과 취향이 흐린 사람답게 대중적인 것도 꽤 좋아한다. 이번 주는 연말 느낌을 내고 싶어서 연말 필수 코스인 연말 모임을 가졌고, (스미노 하야토의) 연주회도 보고 왔다. 아, 아바타 2도 용아맥에서 봤다. 진짜 영상미 지렸다.
물론 개성이란 개념을 마냥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개성이 뚜렷한 사람을 볼 때면 나완 다르게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생각해본다. 우리가 지금 시대에서 느끼는, ‘나’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은 자연스러운 걸까. 혹시 지금 개성이란 개념에 살짝 거품이 껴있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이글 또한 나를 찾는 작업일 수 있다. 너를 빨리 찾으란 사회의 압박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그런 압박 때문에 섣불리 취향을 정하고, 나를 표현하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싶진 않다. 이 글은 그런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