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 은 좋은 것인가
몇달전에 아이들과 영화관에 다녀왔다.
미국에 오고 첫 영화관람이라 아이들은 아주 흥분해있었다.
첫째는 동생이 어릴때 나와 둘이서 알라딘, 겨울왕국 같은 영화를 보았던 좋은 추억때문에
둘째는 난생 처음 가보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설렘으로 인해
그리고 나는 드디어 두아이를 데리고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뿌듯함에 젖어
머릿속에 각자의 마음풍선을 가득 채워 가벼운 걸음으로 그곳에 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나에게 무척 특별한 영화다.
인간은 선하고, 인류의 조상은 호모사피엔스이며 ,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에게 '기쁨'이 주인공인(이라고 여겨지는) 이 영화는
결국 '슬픔'조차도 나의 아름다운 인생을 구성하는 하나의 퍼즐조각이라는 신념을 한층 강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뭐. 미국 애니메이션 전체를 관통하는 옵티미즘? 을 나는 애정한다.
인사이드 아웃2는 내 머릿속 어딘가 남아있는 전편의 감동을 휘발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전편을 넘어서는 속편임을 당당히 보여주었다.
나는 의기양양했다.
뭐랄까, 나의 신념을 인정받았다는 뿌듯함?
불안의 폭주를 보며 모두들 눈물을 훔칠때, 나도 내안에 못생긴 아이를 가만히 끌어안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하고싶은 이야기는 불안, 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라일리, 너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 속삭이는 빛나는 꽃송이에게 내 눈이 멈춘다.
좋은 사람이란, 대체 어떤것인가.
착하다, 라는 것은 과연 좋은것인가.
영어로 착하다는 굿, 좋다도 굿, 이기에
나는 두말을 동의어로 받아들인다
오래전에 두번세번 돌려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도그빌'
그 이름도 뭔가 께름직한, 개마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이니 만큼
독특한 연출이 시작부터 숨을 죽이게한다
연극 한편을 보는듯 펼쳐지는 이야기는 한창 미모가 절정에 이른 니콜키드먼의 착함이 소재가 된다.
그녀의 착함, 관용과 용서로 대변되는 선함이
평범한 대중의 마음 깊은 속에 숨은 악을 이끌어 낸다.
다양한 가면으로 가려진 군중들의 비열함, 잔혹함, 교활함은 그녀의 착함,을 통해 제 모습을 찾는다.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던 기억.
결국 결말은 대 반전으로 끝이나는 정말 화끈한 영화.
오만함이 낳은 관용의 모순에 대한 영화였지만(평론에 따르면)
나에게 주인공 그레이스의 착함이 인간의 악함을 불러내는 장면들이 깊숙이 와닿았다.
- 착함은 좋은것인가 -
나의 자유를 위한 착함 - 내가 구도자인가
상대의 기쁨을 위한 착함 - 그것은 과연 내것인가
그냥 착함 - 나는 풀이나 꽃인가
결국 착함이 나를 위한 것이든, 너를 위한 것이든 나는 신도 아니고 풀이나 꽃도 아니다.
딸아이가 착하려고 할때, 가끔 화가 난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때, 분노하지 않고 움츠려들거나 더 잘하려고 하는
그 아이를 볼때
속이 쓰리다.
말도 안되는 말을 들으면, 짓이겨 뭉개버리는 네가 되었으면
누가 한대 치면 너는 이단 옆차기를 날렸으면
어른이라고, 좋아하는 친구라고, 부모라고, 네가 착하려하지 않았으면
아닐땐 아니라고 했으면
차라리 도망이라도 쳤으면.
가끔 그런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세상을 향한 작은 반항
착하려 애쓰다 모두를 불태우지도, 모두에게 유린당하지도 않도록.
그때그때, 순간순간, 착하지 말자.
착함이 꼭 좋은 것은 아니야
그리고 꼭 좋은 것이 너를 지켜주는 것도 아니야.
그래 확실하다니까.
하지만 딸아,
나는 왜 이리도 여린 풀잎이 좋으냐
나는 이다지도 작고 여리고 친절한 것들이 좋을까.
네가 착하려 애쓰다 속이 부르터 눈이 새빨게 져도
그래도 뾰족함 보다는 여린것이 좋다고 말하고 싶을까.
아직 멀었나보다.
엄마는 아직도 라일리의 꽃송이 마법에서 못헤어나오는가보다.
그래도 우리 기억하자.
나를 할퀴울 바람과 나와 함께 몸을 흔들어줄 풀잎을 구별하자.
그리고 그 바람에게 말하자
저리가!
나는 착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