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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생

등잔 밑 행복녀의 첫 시련

by ZAMBY



오늘은 처음으로 둘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쓸까 한다.


아이가 둘 이상 있는 부모님들은 공감하실지 모르겠다.


첫 아이는 참 특별하다.

살짝 눈치가 없고 조금 느릿하고 또 그래서 불안한.

그러면서도 늘 눈은 맏이를 향하고

모든 정성은 내가 처음 낳아본 아이에게 들이붓다시피 한다.

그래서일까 기대도 크고 실망은 그것의 몇 배는 되는.

나를 울고 웃게 하는 우리 집 장녀.


그에 반해 둘째는. 곧 막내고

그래서 늘 언니의 배경 같은 존재다.

바라는 것 없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워

내가 지금 강아지를 키우나 싶을 만큼.


이 아이는 어설픈 부모의 모든 육아 실험과 모험,

그리고 좌절로부터 자유로웠다.

언니와 나이차이도 좀 나는 덕에

늘 등잔밑에서 편안하게 자라온 동생이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철학에 딱 들어맞는 유년기를 보내던 둘째 아이가

만 6세 때 미국에 왔다.

알파벳 하나 모른 채로.

물론 한글도 거의 안 배운 상태로.


안 들리고 말 못 하고 까막눈인 상태로 보낸 초기 미국 생활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생각한다.

별 탈 없이 지나온 시간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웬걸.

나는 요즘 저녁마다 아이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댄다.


"야. 너 지금도 한글 못하고 한국 가면 애들한테 놀림받아."

"영어도 못하고 한글도 못해서 가게 되면 정말 큰일 난다고."

"도대체 몇 번을 알려줘야 해. 일의 자리 숫자끼리 먼저 빼라고!!"

"니 언니는 다섯 살 때 한글 다 읽었어!"

"누굴 닮은 거야.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누굴 닮긴.

내 배에서 나왔는데.


밤마다 잠든 아이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먀냥 놀아도 부족한 하루에,

한 시간을 엄마 눈치를 보며 교과서를 풀어야 하다니.

우리 집 등잔 밑 행복녀에게 최대 시련이 닥친 거다.


어젯밤에도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대곤

잠든 아이를 보며 작년에 쓴 브런치 글을 읽었다.

그 글에는 아이의 그림일기 사진이 업로드되어있었다.


책장에 꽂아둔 아이의 그림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는다.

여러 장의 종이 위에 귀여운 여자아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글에는 Sistr and Me HB Hb. 이렇게 쓰여있다.

시스터와 내가... 에이치비 에이치비.

HB라는 글자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HB연필.jpg 자료화면. HB연필


1년 전. 학교에 상담을 갔을 때 선생님이 알려주신 그 글자의 의미는

햅비, Happy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아이가 반년 전에 비해 얼마나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 주었다.

선생님은 알파벳의 나열이던 아이의 그림일기가

적어도 단어와 문장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아이의 보드랍고 통통한 손을 잡고 기도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하게 해 주세요."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수많은 책과 교육 콘텐츠를 보며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게 남의 아이일 경우에만 적용가능한 이론이라는 걸

나는 매일 실감한다.


내 아이가 새로셈을 일주일간 하다가 가로셈법을 잊으면

나는 광포한 왕이 되어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너 내일부터 나가서 놀지 마!"


글밥이 작은 영어 동화책을 야무지게 읽다가

쉬운 단어 하나를 못 읽으면 침대 매트리스가 내려앉을듯이 한숨을 쉬기도 하고

한글 오르다를 오러다로 읽는 아이에게 "다시"라고 말하며 눈을 부라리기도 한다.


언니의 그늘에 숨에 매일이 HB, HB 하던 초등1학년 여자아이가

드디어 독립한 거다. 강제독립.


성장하고 있음에

덧셈 뺄셈 못하고 한글 못 읽는 어른은 만나기 힘든데

언젠가는 하겠지.

이 마음을 왜 나는 못 먹는 걸까.


아이가 요즘은 학교에서 그림일기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의 그림일기에 아직도 Hb한 그림이 있는지.

여전히 밝게 웃는 내 얼굴이 그려져 있는지.

문득 자신이 없어진다.


매일같이 다짐해도 안 되는 그것.

너를 믿는 것.

네가 잘하고 있다고 응원하는 것.

그리고 나 자신에게 불안해 말라고 위로하는 것.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



등잔밑에서 등 떠 밀려 나온 막내에게

오늘은 쿨하게 말해줘야지.


야. 오늘은 그거 하지 마! 그냥 엄마랑 놀자.




<등잔 밑 행복녀의 HB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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