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11살이 되는 우리 집 장녀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고래다.
미국에서 2년간 지내면서 좋았던 점을 꼽자면
1. 일생을 괴롭히던 비염이 사라졌다.
2. 아침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3. 아이들이 몸으로 활동하는 시간이 늘었다.
4. 당연히 디지털 디바이스를 멀리하게 되었다.
5. 좋아하는 동물과 장소, 장래희망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미국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종종 네발로 기어 다니고
고양이 꼬리 같은 걸 허리에 두르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다.
학교를 상징하는 동물이 도마뱀이라 아이들이 도마뱀을 사랑하게 되었고
학기말 공연에는 사냥꾼과 숲 속 동물들이 나오는 뮤지컬을 하고
유치원 졸업식에는 온갖 곤충들이 등장하는 음악회도 열린다.
아침 산책을 하다 사슴 가족을 조우하고
뒷마당에는 늘 다람쥐들이 뛰어다닌다.
밤에는 박쥐가 하늘을 날고
지붕 꼭대기에서 부엉이가 부엉부엉 울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의 동물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서보다 많이 높아졌고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로 책을 만드는 수업도 하기에
그 동물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기도 한다.
덕분에 나도 쥐와 여우, 돼지와 고양이가 주인공이 되는 그림책을 아끼게 되었고
그 동물들과 유대감을 가지기도 한다.
때로 집 안에 뱀이나 쥐 같은 것들이 침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뭐. 걔네가 살기 좋은 곳이 사람에게도 좋은 곳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서론이 길었다.
아이가 고래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도 고래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52Hz 주파수를 가진 고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미해군이 처음 발견했다는 이 고래는
다른 고래들이 20-30Hz의 주파수로 소통하는데 반해
매우 높은 음역대의 언어를 이용한다는 것.
그래서 이 고래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로 칭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관측한 사례는 아직 없고
미해군의 수중청음으로만 추적되었다는
-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The world's loneliest whale)-
나는 이번에 처음 이 고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이미 방탄소년단이 이 고래에게 자신들의 고독을 빗대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의 노래를.
이 세상에 내 언어를 이해하는 존재가 나 하나라면.
우리 딸은 MBTI 약식 검사에서 ENFP가 나오는 명랑한 소녀다.
그녀가 이 고래에게 마음을 주게 된 것은
다르 언어를 쓰는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세상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한국어 써도 말이 안 통할 때 많아. 살아보면."
그녀는 ?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중에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니까."
사춘기를 극한으로 겪어 본 사람은 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그때 요즘 전문용어로 '선택적 함구증' 비슷한 증세를 겪었다.
당시엔 그냥 반항. 하는 걸로 여겨졌지만
돌이켜 보니 그게 일종의 불안증상이었던 듯하다.
그때의 나는 52Hz 주파수를 쓰는 고래였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할 거 같아서
말해야 입이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
그래서 한두어 달 말을 안 하다가
나중에는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잠자면 말을 안해도 되니까.
딸아이가 영어 콤플렉스로 비선택적 함구증(?)을 살짝 경험하게 되면서
나도 간만에 내 사춘기 시절의 말 못 하던 외로움을 상기했다.
어찌나 외롭던지.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단정이
얼마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던지.
중년이 되어 도무지 함구가 안 되는 지금의 내가
그때 철없던 나를 한번 안아주고 싶다.
"욕봤다."
평생 내 언어가 52Hz라고 느끼는 순간을 조우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가 내 언어를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내 딸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라고 느끼는 어느 날에
같은 주파수로 노래하는 고래 한 마리가 태평양 바닷속을 헤엄쳐 오기를.
뭐 많을 필요 있나.
한 마리면 충분하지.
종교나 철학이 생겨난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주파수가 각자 달라
그 지독한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지금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 고래는
바닷속에서 인간이 찾지 못한 삶의 의미를 찾아냈을지도 모르겠다.
싯다르타 웨일.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며
딸이 그린 고래를 본다.
고래 아래에 멘트가 옅게 보인다.
I always love you.
얘는 부디 나 같은 사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