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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Nov 16. 2024

목욕탕 노스탤지어

내가 한국을 좋아하는 백만가지 이유 둘




없다.

처음 미국에 오고 가장 당황한 부분.

샤워기가 높은 곳에 붙어 있다.

줄이 없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여성에게

샤워기 호스는 매우 중요하다.

키가 작은 아이의 머리를 깨끗이 헹구기 위해서

욕조에 낀 물때를 지우기 위해서

변기를 청소하고 깨끗한 물로 헹궈내고 싶을 때


한 번도 호스가 달리지 않은 샤워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과거 언젠가 출장이나 여행에서 한번쯤 경험해 봤음직하지만 하루 이틀이니 금세 잊어버린 신박한 불편함.


미국의 가정집 욕실은 건식이다.

말 그대로 물기가 없다.

화장실 바닥에 물이 내려가는 구멍도 없고.

머리카락을 걸러주는 채반(?)도 없다.

욕조에 들어가서 벽에 붙은 샤워기로 몸을 씻다 보면

사방팔방으로 물이 튄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온 다음날 샤워커튼과 호스가 달린 샤워기를 구입했다.

샤워커튼은 어설프게 보였지만 완전하게 욕조 밖으로 물이 튀는 것을 막아주었고.

새로 산 줄 달린 샤워기를 예전 것과 교체하는데도 큰 노력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식 욕실에서 한국식으로 샤워를 한다.

아마존에서 싱크대용 거름망을 사서 욕조 물구멍을 막고

긴 호스가 달린 샤위기로 머리를 앞뒤로 헹구고

초록색 이태리타월로 몸에 비누을 칠한다.


이태리타월은 시어머니께서 주신 선물이다

미국에 가면 목욕탕이 없을 테니 이걸로 아이들 때를 밀어주라며

길고 짧은 이태리타월을 여러 장 주셨다.

이태리에 미안하다


<이태리타월의 유래>

이태리타월은 1967년도에 부산 초읍동 현 창곡시장자리에 한일직물(대표 김원조)이라는 섬유회사에서 처음 개발 되어 만들어졌다. '이태리타월'로 불리게 된 것은 비스코스라는 실이 이태리에서 생산되는 것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연사 및 직조과정을 거쳐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뭐든지 알려주는 위키백과>



 역시 이태리다.


어릴 적에 우리 가족은 5층짜리 맨숀의 맨 아래층에 살았다.

당시에는 연탄보일러를 때던 시절이라

엄마는 늘 새카만 연탄을 우리 집 뒷베란다에 쌓아두고 밤이면 두어 번 일어나 연탄을 갈러 안방을 나갔다.

욕실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따뜻한 물을 콸콸 틀어 샤워를 하거나 몸을 담갔던 기억이 크게 없다.

물을 아껴야 해서, 연탄도 아껴야 해서

커다란 고무다라이에 가스로 데워온 물을 부어 세수를 하고 몸을 씻었다.

내가 어릴 때 고무다라이는 국민아이템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시댁에서 김장할 때 가끔 볼까 말까 하는 빛바랜 옅은 버건디(?)색 바스켓.

빨래할 때, 아기 목욕시킬 때, 김장할 때, 매실청 담글 때, 심지어 학교 운동회날 술병을 담아놓는 기능도 했다.

 


고무다라이 참고사진(출처. 당근마켓)


다시 짠내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와서.

차갑고 건조한 겨울에도 나와 동생은 늘상 바깥에서 뛰어놀았다.

그래서 우리 남매의 손등은 이태리타월처럼 거칠고 거북이 등껍질마냥 크렉이 가있었다.

그런 거 요즘 사람들은 모를 거 같다.

핸드크림을 안 바른 채 겨우내 바깥에서 놀면 손등에 각질이 다 일어난다.

그래서 엄마는 일요일 아침이면 우리 남매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으로 향했다.

냉탕과 온탕.

엄마는 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탕에 나를 끌고 들어갔다.

동생은 냉탕에서 노느라 바쁘니까.

좀 더 큰 나는 얼른 때를 밀어야 하니 꼼짝없이 섭씨 44도다

그 정도 될 거 같다. 심리적 온도.

온몸에 물집이 맺힐 것만 같은 열사의 온도.

아 정말 고역이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 할머니들과 즐거운 온탕시간을 보내지만

나는 땀이 삐질삐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앉아있다.

그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이 시간이 지나면 초코우유를 하나 먹을 수 있다는 희망?


내 표피의 각질들이 부드럽게 무르익었다 싶으면

다음 난관이 기다린다.

그 질기고 거친 이태리타월

엄마는 가끔 내 엉덩이를, 등판을 찰싹 때리기도 하면서 열심히 때를 밀었다.

가장 좋은 순간은

각질이 일어나 내보기에도 좀 부끄러운 손등을 살살 밀어주는 엄마의 긴 속눈썹을 니려다 볼 때였다.

뭐.

목욕탕의 풍경이란 참으로 노스탤지어를 부르는 소재라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린 마음에 너무 파격적이라 민망했던 검정색, 붉은색 레이스 속옷을 입은 세신사 이모들.

목욕탕 평상에 알몸으로 누워 얼굴에 바케스만 덮고 자던 이모

오이를 가느라 온 바닥에 초록색 껍질을 떨어뜨리던 이모

냉탕에서 놀다가 등짝을 후려 맞으며 끌려 나오던 개구쟁이들

엄마 발목에 묶여있던 쇠로 만든 신기한 라커열쇠

높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들.

저 높이에 작은 창문사이로 들어오던 햇살과 만나 곡선을 그리던 옅은 수증기 물결

하나하나

이태리타월이 훑고 지나간 따가운 피부를 느끼며 바라보았다.


엄마는 목욕탕에 가면 유난히 무서웠다.

내 겨드랑이나 배를 딱딱한 수건으로 문지를 때 내가 간지러워 웃으면 가만있으라며 정색했다.

지나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끔 나도 두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간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는 내 몸에 각질만 벗긴다.

아이들은 그냥 냉탕, 온탕 적당히 담갔다가

슬렁슬렁 씻긴다. 너무 힘드니까.

산소가 부족한 뜨거운 공기

귀가 멍하게 울리는 각종 소리들

다닥다닥 곁에 붙은 낯선 어른들

아이들 둘을 차례로 구석구석 씻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 어려운걸 그때 엄마들은 다 했다.

목욕탕에서 종종 마주쳤던 동네 친구는 자매가 셋이었다.

그 엄마도 목욕탕에 다녀오면 녹초가 되었겠지.


미국의 욕실 이야기를 하다가

급 치열했던 대한민국의 80년대로 돌아갔다.

다들 열심히 살았던 시절

주 6일 근무하느라, 일요일에는 부장님 모시고 등산 가느라

더운물 가스에 데우고, 자다 일어나 연탄 갈고, 애들 때 벗겨주느라

모두가 분주했던 내 어린 시절.

투박하고, 때로 덜 문명화(?)되어 이런저런 실수도 잦았지만

그래도 몸을 쓰고, 마음을 써서 주변을 돌보던 사람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른 같았던 나보다 훨씬 어렸던 엄마와 아빠.


나는 항상 내 유년기를 감싸고 있던 그 무드를 좋아한다.

곁에 앉은 이유로 누구 엄마 부르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던 아줌마

바알 간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요구르트 한 개 슬쩍 쥐어주던 사장님

엄마 손을 잡고 걸어 내려오던 한산한 시장길

커다간 리어카에 스프링 말 네댓 마리 싣고 아이들을 맞이하던 흰 수염이 숭숭 난 할아버지


아날로그 효과 들어간 비디오 테이프처럼

나는 그때 내 나라의 목욕문화를 추억한다.

일요일 아침.

아직 어스름이 남은 이른 새벽, 별을 보며 엄마와 걸었던 목욕탕 가는 길.

몸과 몸이 부대끼는 진솔한 삶의 현장을.




참.

미국 아이들은 웬만해선 샤워를 함께 하지 않는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딸아이의 현지인 친구들은

수영을 마치고 든 슬립오버를 하는 날이던

결코 함께 샤워를 하지 않았다.

길에서는 속옷만(?) 입고도 잘들 다니는데 말이다




추억의 리어카 말타기 <출처.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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