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변화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조타수가 되는 것!
우리는 왜 트루먼쇼에 열광하는가?
1998년 나온 트루먼쇼는 미래사회를 가늠케 한 변화의 서막이었다. 누구나 한 사람의 일생을 쇼와 같이 살펴볼 수 있었고 그들은 애정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트루먼과 일면식이 없는 이들도 이를 이웃처럼 친구처럼 자식처럼 아끼고 즐거워했다. 트루먼은 물론 이들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인생 자체가 쇼라는 사실도 모른 체 살아온 것이다.
반대편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트루먼에 대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해 제약을 걸기도 하고 공감을 하기도 했다. 10년 정도 지난 이 시점과 비교하면 다른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게 닮아있다.
다른 점은 과거 트루먼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은 쇼가 아니며 누군가 관찰하게 두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지 오웰에 소설 속 빅브라더는 늘 권력의 횡포 자였고 타개해야 할 대상이었다. 빅브라더로 지칭되는 PD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주범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이러한 현상을 비난하지 않는다(물론 비판은 하겠지만) 헉슬리로 대표되는 멋진 신세계는 현실이 되었고 빅브라더에 대해서는 무던해졌다. 오히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드러내고 보여주면서 희열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던지고(별풍선처럼) 좋아요와 공유를 하며 즐거워한다. 감시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발적 통제를 권유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제와 트루먼 쇼가 각색된다면 일생을 쇼비즈니스로 살아간 한 남자가 스스로 통제하며 사라져가는 모습으로 변화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여전히 트루먼쇼에 살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트루먼쇼에 등장하는 트루먼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개 대중처럼 즐거워하고 여러 이야기가 회자된다. 언론과 블로그와 소셜에서 크리에이터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의 여전한 공통점은 주제가 되는 사람에 대해서 즐거움과 공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누구나 대중인 동시에 주제가 될 수 있는 사회이다. 오히려 주제 거리가 되기 위해 온 몸을 내던지는 다수가 등장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공개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개인들이 많아질 것이다. 통제가 권장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변화에 올라타야 하며 방향을 바꿔주는 조타수가 되어야 한다. 감정의 양극화로 빠지는 극단주의적 사회로 바뀌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감정 소비가 심해질 수록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적 동굴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 신체 모두 피폐해질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가 만나는 새로운 사회 역시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일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똑같이 트루먼을 바라보는 대중처럼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사회현상은 바다처럼 처음은 작은 진동으로 시작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어 흡뻑젖게 만들 것이다. 변화하는 미래는 분명 방향을 잡아주는 조타수가 성공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