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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un Apr 12. 2023

요가 7개월, 아직 새싹이 입니다

요가를 통해 배운 인생을 바라보는 눈  



달리기를 한창  때였다. 달리기만 끝나면 이상하리만치 골반과 발바닥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오는 근육통정도로만 치부했지만, 골반은 둘째 치고, 발바닥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렇게 찾아간 병원에서 결국 '족저근막염'판정을 받았고, 그때부터 문제는 조금씩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조금만 걸어도 바닥에 튀어나온 못을 밟은  같은 통증이 발을 휘감았고, 점점 걷는 행위 자체를 피하기 시작했다. 점점  살이 쪘고,  스트레스는 당연히 먹는 행위로 풀게 되면서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미관상의 이유는 둘째 치고, 혼자 지내는 유학생활에서 이런  상태로는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됐든 몸을 움직이는 행위(?) 해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즈음,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요가 수련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다른 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그리고 집에서   있다는 간편함, 무엇보다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향수병을 달랠  시작해 보기로 했다.


요가를 시작하면서도 내 몸이 엄청나게 바뀔 거라는 큰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녹슬어가는 근육을 조금이라도 더 사용함으로써 조금이라도 건강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온라인 요가를 시작한 지 어언 7개월 차. 지금은 하루라도 요가를 안 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요가중독자(?)가 된 스스로를 발견할 때마다 놀라곤 한다.


요가에 대한  인상은 명상과 병행되는 '정적인 스트레칭' 느낌에 가까웠다. 정적인 스트레칭. 사실  표현이 요가를 설명하는  있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요가수련을 통해 얻은 가장  배움은, 건강해지기 위해 하는 운동은  행위 자체가  신체를 위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요가수련에서 강조하는 2가지가 있다.  번째는 골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가슴, 즉 심장이다.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일상생활에서 신체 하나하나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어쩌면 판타지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을, 요가시간에는 해내야 한다. '거기에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위로하는 .'

요가 동작을 취하다 보면, 잘 쓰지 않았던 근육 등을 사용하게 되면서 통증이 밀려올 때가 꽤 있다. 그럴 때마다 요가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늘 동일하다.


" 잘 쓰지 않는 근육들을 위로하세요. '괜찮다, 괜찮다' 그리고 그것이 그곳에 있음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


"무겁게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시고, 그 안을 비워내려고 노력하세요. 그리고 그 텅 비워진 공간을 따스하고, 빛나는 에너지로 채워가세요."


처음엔 이게  소린가 싶었다. 동작을 취하고, 버티는 동안 이러한 말들을  하듯이 풀어내는 선생님의 모습이 나에겐 그저 어색했을 뿐. ( 그래도 힘들어 죽겠구먼!)  그래도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세상, 요가수업을 빙자한 이상한 종교단체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해질 무렵, 서서히  몸이 바뀌어 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겁게 짓눌려있는  긴장돼 있던 어깨가 서서히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골반 주변의 뻐근함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가장 드라마틱했던 변화는 가슴 주변에 응어리지듯 몰려있던 통증. 무겁게 짓눌린 듯한  느낌이 어느  갑자기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오늘은  어디가 얼마큼 좋아져 있을까, 매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새벽 수련에  목소리로  하는 요가 선생님의 가끔씩 등장하는 삑사리에 몰래 킥킥거릴 여유도 생겼고, 어렵거나 힘든 동작 중간에도 펼쳐지는  근육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쫓아가는 데서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운동이란, 숨이 턱끝까지 차 오르고, 온몸의 모든 수분을 땀으로 배출해야만 의미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힘들어야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내가 괴로운 현재만큼, 미래가 더 아름다워지리라 기대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 그리고 끝없이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 내가 아는 운동의 정의였다. 하지만 그 과정이 계속 고통으로 차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얼마큼 지속할 수 있을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인생을 고통으로 채워가는 것을 반길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과정이 늘 달콤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만큼 우리의 몸도 고통을 느낀 다는 것은 어찌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풀어낼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고통의 찌꺼기들이 쌓이면,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그 고통들을 우리 안에 축적해 나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요가는 그렇게 쌓아진 내 안의 흔적들을 위로하고, 풀어내 나가는 과정이었다.


움직이는 만큼, 그리고 들이는 시간만큼 눈에 띄는 변화를 운동에 요구하는 시대상에서 어쩌면 요가라는 운동은 어쩌면 시대의 흐름에서 자못 멀리 떨어진 운동인 것처럼 보인다. 요가열풍이 불었던 적도 있지만, 그 열풍이 사라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요가를 배울 수 있는 곳들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요가학원들이 아직까지 지속될 수 있는 건, 사막과도 같은 삭막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언젠가 향할 거라 기대하는 그들의 마지막 보루, 혹은 오아시스여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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