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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Feb 18. 2024

'느린 아이'라는 주홍글씨

아이가 나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느리게 걷는 줄 알았어

우리 아파트는 늦은 밤 1층에 주차를 할 경우 아침에 차를 빼달라는 연락이 종종 온다.

그 날도 차를 빼달라고 연락이 왔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쁜 상태였지만 멈추고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했다.

혼자 금방 갔다왔으면 좋겠는데 7세 첫째 아이는 엄마를 따라 나서겠다고 다급하게 움직였다.

잠깐 나갔다 오는거라고 충분히 설명을 했음에도 따라나서겠다고 울면서 설쳤다.


"잠깐 집에 있어. 엄마 금방 오잖아~!"

말을 듣지 않자 나는 조금 더 단호한 표정과 말로 따라오지 말라고 말했다.


첫째가 따라나오면 잠에서 곧 깰 것 같은 4살 동생도 따라와야 할 수도 있다.

날도 매우 추운데 두명을 옷 입히고 신발 신기고 조수석에 앉힐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아이는 놓치지 않을 새라 내 뒤꽁무니를 허겁지겁 쫓아나왔다.

따라오는 아이의 슬리퍼 헛발질과 긴장의 숨결이 짠했다.


할 수 없이 얼른 따라오라는 제스쳐로 손목을 뒤로 내민 채 엘리베이터를 급히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잠에서 깨지 않은 둘째 아이가 집에 혼자 있기도 했다지만 영화의 추격신 같은 발걸음 박자는 내게 익숙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차주는 없었다. 아이를 태우고 다른 곳에 재주차를 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를 재촉하고 다그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차주도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 줬을 텐데 내 눈에는 딸의 긴장은

보이지 않았다. 나조차도 돌보지 못한 채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까지 마음이 힘겹게 다급했던가.


딸에게 잡으라고 내민 나의 손목은 어린시절 나의 엄마의 손목이었다.

복잡한 시장통 사람들 틈에 보이는 흰 팔뚝에 찬 금색 손목시계는 결코 잡히지 않은 물고기였다.

내 뒷 모습도 딸에게 그런 모습이었겠지. 세상이 등 떠미는 박자에 따라가기 위한 위급한 다급함이었다.


어릴 적 부모의 과도한 재촉은 나의 마음에  '느린 사람'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그 글씨는 오래도록 나를 힘들고 괴롭혔다. 행동파 엄마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아빠의 재촉은

한참 자라고 있는 내게도 합을 이루어 삼박자를 맞추길 요구했다. 특히 과속하고 끼어들기를 하는 아빠의 차를

타면 도착할 때까지 나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내 운명을 맡겼다.


'이건 나의 숙명이야. 하늘나라에 가도 어쩔 수 없어. 내게 이 차를 타지 않을 권리란 없다.'


빠른 눈치와 복종 그리고 최대의 효율로 부모의 삶에 동참했다.

그렇지 않으면 피멍으로 얼룩졌던 아빠의 어린시절과 아빠에게 들었던 군대에서의 고통이 내게도 재현되었다.

하나님은 감내할 수 있는 고통까지만 주신다는 말씀을 믿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태어나서 부터 나의 속도대로 자라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른들이 삼는 기준 속도에 맞추지 못했다는 주홍글씨는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하는 일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괴로움을 주었다. 마치 스케이트를 타는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분한 점프 연습을 채 못했는데 트리플악셀을 하라고 떠미는 것과 같다. 무리한 연습은 몸을 다치게 하고 결국 영영 스케이트를 다치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시간을 충분히 탐구해 볼 여지가 없는 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느린' 방어기제를 사용하거나 심하다면 아예 스케이트를 신을 수 조차 없는 무기력한 지경에 빠트릴 뿐이다. 




그런 나도 어른이 되는 날이 도래했고,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나는 느리고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일이 숙달되기 전까지는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일에 대한 몰입력이 깊고 대체적으로 데드라인에 맞춰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감당 못할 수많은 일들을 빠르게 처리한 열정페이 같은 소릴 하는 시대도 버텼다. 운이 안 좋게 만난 착취적인 상사의 가스라이팅을 묵묵히 견디면 나의 주홍글씨를 지워줄 것만 같았다. 그 상사가 나에게 뿐 아니라 자신의 상사들과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해고를 당하기 전 까지 나의 ‘자기효능감’은 '오기'라는 경로를 통해  획득됐고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건강악화를 얻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아이에게서 '나의 느린 자아상'을 발견했다.

나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특유의 분위기로 몰아붙이는 재촉이 있고 나면 아이는 유독 더 느리게 행동했다.

재촉할수록 일부러 한땀한땀 천천히 걸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나를 일부러 골탕먹이려고 하는 행동인 줄 알았다.

그런데 두돌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면 좀 다른 문제다. 이 모습은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고자 '자발성'을 잃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였다. 자신이 세상에 중심이 되어 자기 발로 세상을 디디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24개월 쯤이었던 아이와 함께 횡당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주의를 주는 말로 아이를 재촉하는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중간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신호등 초록불은 깜빡거리며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엇고 나는 애가 탔다. 아이의 한쪽 팔을 들어 겨우 끌어내는 식으로 인도에 다다랗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사람들이 보든 말든 아이를 크게 나무랐다.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눅든 표정으로 집으로 향했다. 무엇이 이 조그마한 아이를 위험천만한 비행?을 저지르게 만들었을까.


빨간 불이 되기 전에 얼른 건너자.

왼쪽에서 차가 오는지 확인을 하고 건너자.

빨간불이 되는 지 보이면 엄마한테 말해줄래.

오토바이는 인도로도 막 지나가니까 조심하자


엄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엄마의 표정, 말투, 제스쳐, 빈도, 압도하는 대화의 느낌에 따라 분위기는 다를 수 있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엄마를 믿지 말라며 너무 어린시절부터 공포를 심어주는 나를 발견하였다. 24개월이라면 아직 세상을 있는 그대로도 파악하기에도 바쁜 때다. 자연을 잘 알고 자연스럽게 크길 바란다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만끽할 기회를 가로챘다. 비행으로 깨달음을 준 아이가 오히려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 외에도 아이는 여러가지 상황들을 통해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잘못된 행동의 원인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시작됨을 점점 깨달아 갔다.


이제 구차한 변명이나 핑계는 하지 않겠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거라는, 누구도 기다려주지 못하고 나를 재촉할 사람은 현재 어디에도 없다

차를 빼 줘야 하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서둘러 주는 것이 예의겠지만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 과도한 체면차리기로 나와 내 아이의 마음을 숨가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질타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은 내 가족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게 맞지, 그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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