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디자이너의 스스로를 만끽하는 여행
남자는 그림을 그린다. 줄곧 그림을 그려왔다. 개인전을 준비할 때는 몇 달씩 서울을 벗어나 지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고는 했다. 영감을 얻기 위해 기꺼이 외로워졌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삶이 팍팍해질 때면 그림을 구원 삼아 여행길에 오르곤 했다. 결국은 그림으로 구원과 위안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예술이란 본디 그런 것 아니던가.
채석강에서였다. 남자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던 것은.
그날, 어느 가족이 가족모임을 마치고 사진을 찍으러 채석강에 놀러 온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각각 나름 꽃단장을 한 가족들은 남자가 내쉬는 한숨 중 두 번의 한 번꼴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칠순잔치쯤 되는가 싶게 지긋한 어른들과 자식들, 그 자식들의 손주들까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사진도 찍고 폭죽도 터뜨려가며 완벽한 가족의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그 가족도 세상의 여느 가족처럼 아픔이 있으리라, 사연이 있으리라···. 하지만 그때, 남자는 머리로는 그렇게 알아도 그저 지금 이 순간 그런 평화로움을 느낄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 애처로워 그동안 그림을 그리며 모른 체하고 참아왔던 그 무언가가 터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그림처럼 아름다운 채석강에서 젊고 외로운 화가는 오열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을 갖고 싶다는 아니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시작되었을지 모르겠다.
여자는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여자는 겁이 없었다. 모험심이 많았고 궁금한 게 많았다. 그저 예쁘고 편하고 화려한 보통의 여자들의 허영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여자는 보통 여자들이 엄두도 못 낸다고 하는 오지탐험을 하며 짜릿해하는 밝고 건강한 처자였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스물한 살 어릴 때 다녀온 배낭여행이 한몫 단단히 했다. 다른 여자들이 쇼핑을 목적으로 홍콩을 갈 때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반바지를 입고 태국이나 베트남의 편하지 많은 숙소에서 오지체험을 즐겼다.
한 번은 태국에서 개와 부딪혀 기절하고 잠깐 동안 기억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고도 여행을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호핑 투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지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을 즐기는 씩씩한 아가씨였다. 그녀 또한 한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따뜻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을 때. 좋은 사람이라고 만나보라는 지인의 얘기를 듣고 남자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운명의 어떤 강한 끌림을 느꼈으리라.
어둠을 뚫고 별 기대 없이 나온 남자와 밝음에서 호기심을 갖고 나온 여자는
서로가 속해있던 세상은 조금 달랐지만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가 같은 종의 인간이라는 것을 감으로 알았다.
종이 같은 사람끼리는
왜?라는 이유 없이 그냥 한 단어, 한 문장, 한 웃음, 한 손짓에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화가와 모험심 많은 디자이너의 연애는 시작되었고 둘은 가족이 되기를 시작한다.
남해는 그와 그녀가 가족을 이뤄 살고 싶은 곳이었다. 그래서 함께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캠핑카를 빌려 천천히 남해로 내려가는 신혼여행을 제안한다. 여자의 대답은? 당연히 예스! 그 둘은 같은 종이니까.
5월은 사실 캠핑하기 좋을 때지만 휴가를 내기에 쉬운 시기는 아니다. 하여 비수기 할인 가격에 캠핑카를 빌렸다. 여행의 목적이 허니문이라고 하자 그 외 집기들이나 유료로 빌려야 하는 이것저것 얹어 대여해준다. 신혼부부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드는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첫날, 로맨틱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이 짜릿한 허니문을 시작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둘은 졸업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처럼, 배낭여행을 가는 대학생처럼 자유로웠고 즐거웠다.
둘의 캠핑카 허니문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너무 고되고 너무 힘들지 않게 여행하기!
그러기 위한 행동강령은 이러하다.
첫째! 하루에 이동은 두 시간 반 이상은 하지 않는다.
둘째! 야영은 캠핑장을 이용하고 화장실이 가까운 곳을 이용한다.
5월의 최고의 날씨에 천천히 어떤 속박과 강요 없이 물 흐르듯 즐기고 떠나고 쉬었다가 즐기고 떠나고 ··· 그들의 허니문은 그들의 영혼과 정말 닮아있었다.
캠핑카에 웨딩카 장식을 그대로 한 채 10박 11일을 다녔는데 상황이 그렇다 보니 동네 이장님의 후한 인심으로 동네의 넓은 창고를 집처럼 쓰기도 했고 축하도 여행 내내 받았고 선물도 넘치게 많이 받았다. 사람의 말에는 주술 같은 힘이 있다. 식물에게 긍정의 말을 계속하게 되면 잘 자라고 부정의 말을 하면 쪼그려 들어 자라지 못하는 실험은 유명하다. 그와 그녀는 축복을 계속 받으면서 더욱 아이처럼 순수해졌고 커플이 된 기쁨을 누리면서 여행이 계속되었다.
결정되어있는 일정 같은 건 없는 여행이지만 여정 중 요리연구가 분들을 찾아 보기로 한 것은 정해져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싱글이었지만 둘 다 요리를 좋아하고 예쁜 그릇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닮은꼴 커플이었다. 그래서 하루를 묵기로 결정하고 예약해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요리연구가 분들이 정말 좋은 음식을 하고 싶어서 지방으로 내려가서 만든 곳인데
숙박도 할 수 있고 그들이 해주는 착한 재료 착한 솜씨의 음식도 제공받을 수 있다. 상업적인 곳도 아니지만 알음알음 지인들로 시작해서 꽤 유명해진 곳이다. 그곳에서 화가인 남자와 디자이너이며 모험가인 여자 그리고 고집 있게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걷는 요리연구가들은 늦도록 수다 떨고 세상에 하나뿐 인 음식을 먹으며 아주 인상 깊은 밤을 보낸다. 허니문을 하면서 세계관이 닮은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늦도록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데 음식의 맛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릇이 너무 예뻤다. 그릇이라면 죽고 못 사는 커플이기에 출처를 캤더니 도기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도예 공작실이라고 한다. 다음 여정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물 위를 떠다니듯 여행을 했다. 좋은 데가 있다고 하면 보려고 했다가 상황이 안 되면 못 보기도 했지만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집착하며 해내려고 한 여행이 아니다 보니 맞닥뜨려지는 상황이 모두 그렇게 반짝 거렸다.
어느 정도 가다가 동네가 예쁘면 멈추고 재래시장에 가서 소박하게 장을 봐왔고 이제 남편인 남자가 음식을 하고 이제 아내가 된 여자가 차린다. 밤을 먹고는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하기도 하고 시장에서 사 온 몸빼바지를 나눠 입기도 한다. 튼튼한 나무를 만나면 해먹을 걸어 낮잠을 자기도 하고 야영을 하는 밤이면 둘이서 계속 얘기를 나눈다.
불과 몇 년 전, 채석강에서 오열하며 절절하게 외롭던 청춘 화가와 모험심을 갖고 눈을 반짝이며 오지를 체험하던 여자는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서로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뭐랄까? 봉지커피믹스로 진하게 탄 커피에 에이스를 푹! 담근 상태랄까?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젖고 서로에게 섞여서 더욱 업그레이드된 “맛”으로 숙성되기 시작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란 게, 신혼여행이란 게 갖춰야 할 덕목 중 서로를 최대한 누리며 함께 더 좋은 맛으로 되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세계의 문화유산, 유서 깊은 관광지, 천혜의 자연에 가보는 것이 혹은 “나 어디 갔다 왔잖아.”라고 얘기하는 게 더 중요할까? 그렇지 않다.
문화유산일수록 검색 포털에 치면 바로바로 눈으로 보듯이 자료가 쏟아지는 세상이 아닌가? 허니문에서는 어쩌면 바깥을 봐야 하는 게 아니고 바깥을 배경으로 서로를 보는 것이 가장 필요할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허니문을 보냈다고 자신만만한 이 여행자이자 예술가인 커플처럼 말이다. 여행자도 예술가도 아니고 그런 삶을 동경만 하고 있는 당신도, 허니문을 그렇게 다녀올 수는 있다. 허니문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