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말없이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또다시 울컥한 난,
"무경씨는 솔직한 거야 아니면 바보야? 그걸 또 물어본다고 얘기해?"
예민하게 묻는 나의 질문에 무경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물어보니까......"
"내가 물어본다고 그걸 곧이 곧대로 말을 해? 내 기분은 상관없어? 아까도 그래. 예정보다 빨리 올 거면 온다고 미리 얘기해주면 좋았잖아. 그 먼 곳 보내 놓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물어보면 되잖아. 그 정도 신뢰도 없어? 나한테?"
무경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게...... 자기가 화난 거."
"응?"
"내가, 시창이 때려서?"
"그 얘기가 아니잖아."
"예랑아."
"왜?"
"난 지금, 어떨 것 같아?"
"........."
"뉴욕 가서 일 때문에 계속 회의하고, 미팅하고,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어. 그래도 그 스케줄 다 소화했어. 왜냐면 빨리 일을 끝내야 돌아와서 널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자기 합격 소식 듣고 일정 다 미루고 온 거야. 비행기 안에서 열 시간 넘게 오는데도 행복했어. 왠지 알아? 자기 볼 생각에 잠도 못 잘 정도로 설레었거든. 그런데 그 기사를 봤어. 그때 내 마음은 어땠을 것 같아?"
"그거,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그래, 알아. 하지만 내 애인하고 동생의 일이야. 그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알어? 그런 일 안 생기게 해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지금 억지 부리는 거야?"
"........."
"자기야 말로 날 믿어? 지금 이렇게 나한테 화내는 거 내가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시창이 때려서 그런 것 같은데 그건 우리 둘 문제고, 아무리 내가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내 편이어야 되잖아.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오히려 들어봐 줘야 하잖아. 그런데 자기는 날 찾아와서 지금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는 거지. 맞아?"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을지, 그 일분일초가 어땠을지 짐작해보았다. 지금 내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최근에 본 가장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만져주고 싶다. 그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힘들게 해서 내가 잘못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무경씨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우리,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줄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어. 이런 일로 서로 실망할 거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앞으로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지."
나의 생각 없는 말이 끝날 즈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난 '흠칫' 놀랐다.
그는 너무도 슬픈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나의 말에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이 촉촉했다.
"무경씨......"
그를 보며 나지막하게 불렀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또각또각' 가까이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경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어떤 여자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어제 시창과 함께 연남동에 있었던 '그녀'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복도의 밝은 불빛 아래에서 그녀는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해 보였다.
잠시 후, 내 앞에 멈추어 선 그녀가 날 쳐다본다.
"할 말 끝나셨어요? 무경이랑 할 말이 있는데."
낭랑하면서도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나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더니 무경을 집 안으로 끌고 가며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 앞에 서서 난 한동안 뚫어져라 앞을 쳐다보았는데, 멍한 표정으로 초인종 벨을 누르려다가 그만, 그 손을 떨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며칠이 지나도 무경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핸드폰을 확인하며, 먼저 연락을 해볼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결국엔 매번 그의 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기다렸다.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혹시 그가 말했던 '승주'라는 전 애인이 맞는지. 그런데 왜 아직도 그를 찾아오는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너무도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날 멈추게 한 건 내가 그에게 던진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우리,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줄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어. 이런 일로 서로 실망할 거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앞으로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지."
왜 그랬을까. 분명히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단순히 그 한 순간을 이기지 못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남아있는 내 자격지심 때문일까.
왜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했을까.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나의 의미 없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그의 허망한 눈빛이 계속 눈 앞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