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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Jul 12. 2016

#날아가는 인생

시편 90편 3- 10절

 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예전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인이 계셨는데 50대 이후 아침에 눈만 뜨면 괴롭고 후회뿐이라는 말을 하였다.

당시 40대였던 나는 왜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분의 말씀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려고 한다.

인생의 50대는 이제 산 날보다 살 날이 훨씬 적은데다 주변의 나이 드신 분들의 상을 많이 당하는 시기다.

그리고 뭔가 이룩한 것은 없는데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성공이 삶의 질을 높여줄지는 몰라도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시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아주 멋진 세상이었어. 너무 행복한 인생이었어" 라며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죽음 이후의 삶을 모르는 인간들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자신도 영원히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고 산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등바등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하는 것이고.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이 땅의 삶을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한 삶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될 것이므로 나의 이기적 욕망을 한없이 내려놓아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된다.


나는 어떤가

내 삶은 교회를 다니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교회를 다니기 전에는 나의 마음과 생각이 가장 우선이었다.

주변의 조언도 잘 듣는 편이 아니었다. 자아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마지막이자 처음이니 어떻게든 돈을 벌어 잘 살아야 했다. 그런데 내 삶인데도 내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거니와 후회와 상처가 더 많았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나의 자아는 한없이 깨어졌다.

혼자 버티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에서 나는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강력한 힘으로 나를 보듬어줄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위안이었고 평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삶에 위기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혼자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늘 내게 삶의 기준. 삶의 지표가 되어 주었기에 말씀대로 따라 살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신하건대 주 안에서 살아온 삶에는 후회가 거의 없다. 여기서 '거의'라고 한 것은  간혹 말씀대로 살지 않고 꾀를 부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고  힘들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도록 이끄시고 기도하게 하셨다.

또한 삶이 바람에 순간 날려가는 티끌 같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자존심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기에 늘 되돌아보면 감사할 뿐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50대에 들어서자 주변에 부유하게 건강한 삶을 누리던 분들이 하나 둘..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거나 병상에서 누워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슴에 새기게 된다. 그들 중에 믿음의 길에 들어선 분들도 계시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다.

 갑자기 죽은 분들의 경우는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경우라서 남은 가족들이 매우 당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족을 잃어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죽은 뒤의 삶이 있다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는데 어떤 분은 죽은 자신의 남편이 다른 좋은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라며 위안하고 있었다.

죽음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닥칠 지 알 수 없다. 병상에 죽을 것 같이 누웠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나기도 하고 또 가벼운 병증이던 사람이 죽는 수가 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사고로 갑자기 죽는 경우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별을 할 때는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에게 죽음은 멀리 있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우리 교회에 새벽 기도를 매일 나오던 한 장로님이 계셨다.

자신보다 어린 목사님이 설교할 때마다 일부러 "아멘" 하면서 힘을 실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운명의 순간이 다가올 때 자신의 딸에게

"내가 죽을 때 울면 내 손가락으로 네 눈을 찔러버릴 테다"라고 아주 격하게 주의를 주었는데 그 말은 이제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인데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것인지 아니면 딸도 믿음이 좋은 것인지 그녀는 상중에 웃고 다녀서 사람들은

"울지는 못해도 웃는 건 좀 그렇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천국은 분명히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은 후 천국에 가는데 울기보다 웃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주님을 만난다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말씀을 믿는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폐암으로 고통받던 교회 지인이 죽었을 때 화장장에 간 적이 있다.

화장을 하기 전에 우리 교회 사람들이 조용히 기도를 하는데  옆 자리의 다른 상주들은 자신의 죽은 가족의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갈 때 매우 슬프게 부르짖었다. 죽음 앞에서 가슴이 끊어질 듯한 그 고통의 메아리는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비는 것이어서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그들이 죽음 이후의 소망이 있었다면 슬픔이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예전부터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며 "아이고오" 하면서 일부러 곡소리를 내던 풍습을 봐왔던 터라 죽음은 참 두려운 것이기만 하였다. 그런 내가 장례식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고 화장장까지도 무심하게 갈 수 있게 된 것은 교회를 다닌 후 부터인데 말씀을 통해 죽음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삶과 죽음이 이 땅에 같이 하는 이 세상.

삶만 바라보기보다는 죽음도 바라보노라면 이 땅에서 더욱 지혜롭게 후회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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