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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dd Jul 11. 2022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아메리카 원주민 중 라코타 수우족은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을 대신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잠언 시집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전 세계의 잠언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보니 류시화 시인이 "쓴" 시들은 한번도 읽어본적이 없다. 

운좋게 리디셀렉트에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시집이 아닌 에세이 형식인데, 나는 이 책을 시집이라고 부르고싶다.

잠깐.. 시집과 에세이의 차이가 뭘까.. 에세이도 충분히 시가 될 수 있는거 아닐까




류시화 시인이 이제까지 겪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는데, 단순한 글자들의 조합인데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큼 시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불안과 고독도 내 글의 부사와 형용사가 될 것이라고.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작은 세계의 신이 된 것 같았다.


이 책의 초반부에 류시화 시인이 겪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나온다. 

창고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나가보니 강물이 금방이라도 창고를 삼킬 것 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낡은 창고 앞에 서서 위협하듯 불어 오르는 강물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시인이 아닌가!'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이 시를 쓰고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험해야하는 일들로 여겨지고 삶의 의지가 다시 솟았다.
(중략)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거나 시간에 맞춰 어딘가에 도착하기보다 무늬를 그리며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응시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자신의 빛나는 순간을 붙잡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럴수가. 무늬를 그리며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응시하는 것이라니...

이 사람의 언어의 세계는 정말 넓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이 내 머리속에 강렬하게 남았는데, 그래서인지 얼마전 비가 정말 많이 쏟아지는 날의 퇴근길은 정말 재밌었다.

그리 크지 않은 양산 겸 우산, 뚱뚱한 백팩.

하늘에 구멍이 쏟아진듯 내리는 비를 뚫고가는건 오랜만에 아주 짜릿한 경험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가방, 신발, 입고있던 원피스, 머리.. 전부 젖어있었다. 

(차마 우산 없이 갈 수는 없었지만.. 정수리빼고 다 젖어있었다.) 


류시화 시인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상황같지만..

내 성격상(?) 충분히 짜증날만한 상황이었는데 그 모든게 즐거웠다. 

우와! 우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다니...내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조심조심 걷고있는데도 이렇게나 젖다니..!!!


신발을 말리느라 꽤 고생했지만...

지금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퇴근길이었고, 가장 즐거웠던 퇴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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