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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W-(2)-1차대전-트랜치워치

론진 트랜치 1923

by Zeit Feb 09. 2025


손목시계의 탄생


케이스에 러그가 부착된 진정한 의미의 손목시계는 1899~1902년에 벌어진 보어전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최초의 손목시계를 만든 회사 중 하나로 추정되는 H. Williamson Ltd.의 사장이 1933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보어 전쟁 중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장교가 12사이즈 시계를 들고 찾아와 손목에 차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케이스에 고리를 달고 그 위에 끈을 끼우는 방식을 제안했다. 결국 우리는 이 아이디어를 디자인으로 등록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전까지는 시계 주머니를 손목에 감싸는 형태만 존재했다."


실제로 이 회사는 1901년에 이 디자인을 영국 무역위원회에 공식 등록했으며, 1906년의 광고와 1911년 제작된 비슷한 형태의 시계를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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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탄막사격


손목시계가 전장에서 중요해진 것은 탄막사격(barrage)이라는 전술의 도입과 관련이 있다. 포병부대가 일제사격으로 적을 무력화하고, 보병부대가 적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돌진하는 방식이었다. 포병과 보병의 정확한 타이밍이 필수적이었고, 이로 인해 손목시계가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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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는 기관총탄이 난무하는 적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이동탄막사격(creeping barrage)이 필수적이었다. 보병과 포병이 속도를 맞춰 움직여야 했고, 이를 위해 정교한 시간 관리가 필요했다.


갈리폴리


이 전술에서 타이밍의 중요성은 멜깁슨이 주연한 영화 ‘갈리폴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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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8월 7일, 터키 갈리폴리 반도의 네크(Nek) 지역. 영국과 호주 등 연합군은 터키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작전을 준비했다.


당시 전투는 포병이 탄막 사격으로 적의 기세를 제압한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이었으나, 영국군과 호주군의 시계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영국군 포병장교는 제시간에 사격을 중단했지만, 호주군 보병장교의 시계로는 아직 7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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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장교는 당황하여 상부에 보고했지만, 본부에서는 "당신의 시계가 몇 분을 가리키든, 이미 3분 전에 돌격했어야 했다"는 답을 들었다. 이미 오스만군이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돌격이 강행되었고, 45분 만에 600명 중 234명이 사망하고 138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처럼 타이밍이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전장에서 편리하게 볼 수 있는 손목시계가 필수 장비로 자리 잡았다. 총탄과 폭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회중시계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트렌치워치


전쟁 중반까지는 손목시계의 생산과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장교들은 직접 시계를 준비해야 했다. 이에 따라 손목시계 수요가 급증했고, 시계 회사 간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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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한 시계 광고에서는 참호전(Trench Warfare)에서 활용된 손목시계를 ‘Trench Watch(트렌치워치)’라고 표현했다. 이후 군용 손목시계를 트렌치워치라고 부르게 되었다.


트렌치워치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점차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튼튼한 스틸 케이스

일오차 30초 이내의 정밀한 무브먼트

읽기 쉬운 아라비아 숫자 다이얼

비산방지 크리스털

라듐 야광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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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워치가 널리 보급되면서 소대장들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군의 탄막사격이 끝남과 동시에 호각을 부르고 병사들이 참호를 뛰쳐나와 돌격하는 것은 1차대전의 흔한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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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 디자인의 변화


손목시계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시계 디자이너들은 원형의 시계와 사각형의 스트랩이 어떻게 조화롭게 만날지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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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얇은 스트랩을 사용해 원형 케이스와 스트랩이 점처럼 연결되는 방식이었으나, 이후 사각형의 ‘쿠션형(Cushion Case)’ 디자인이 유행했다. 이 디자인은 선과 선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형태로 손목시계의 안정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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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정보장교이자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도 쿠션형 시계를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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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치워치의 유산


소장하고 있는 트렌치워치는 시리얼넘버를 기준으로 1923년에 제작된 쿠션형 모델이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군용 시계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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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얼은 24시간 표시가 빨간색으로 병기되어 있고, 크기는 현대 기준에서는 작은 31mm이지만 손목에 착용했을 때 크게 어색하지 않다. 무브먼트는 론진(Longines) 13.34 샤보네트이며, 1910년에 처음 등장해 1차 대전 동안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상태는 양호하지만 일오차가 1시간 30분이 넘고, 파워리저브는 반나절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100년이 넘은 시계가 여전히 작동한다는 점만으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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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남긴 유산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군대에서 쓰이던 수많은 물품들이 일상으로 흘러들어오면서 패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해군의 네이비 블루 군복은 슈트의 블레이저가 되었다.  

    참호전에서 장교들이 입던 코트는 트렌치코트로 발전했다.  

    트렌치워치는 세련된 슈트에 어울리는 드레스워치로 변화했다.  


드레스워치는 다이얼을 밝게 하고, 숫자를 바 인덱스로 바꾸었으며, 스틸 소재는 금으로 대체되었다. 특히 1932년 파텍 필립(Patek Philippe)에서 발표한 Calatrava Ref.96은 러그 디자인을 개선하여 현대 손목시계의 형태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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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탄생한 트렌치워치는 손목시계 대중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장에서 필수품이었던 손목시계는 이후 패션과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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