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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고집 Aug 20. 2023

나의 환경이 나의 그림자라고?

의정불이(依正不二)_체가 구부러지면 그림자도 구부러진다.


정보(正報)는 체(體)와 같고 의보(依報)는 그림자와 같아서 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정보(正報)가 없으면 의보(依報)도 없다.  - 의정불이(依正不二)



어느 날 불교동아리 선배와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였다. 그가 문득 주먹을 쥔 손을 식탁에 놓고 검지 손가락을 펴서 기역자로 구부렸다. 조명아래 구부러진 그림자를 가리키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 그림자를 똑바로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삼각함수를 풀듯, 조명을 어떻게 바꾸면 될까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려고 집중하느라 침묵이 흘렀다.

그때 그가 검지손가락을 똑바로 세웠다. 그림자가 따라 움직였다. 나는 어처구니가 었다. 그건 누구나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왜 전율이 일었을까.
마치 화두를 깬 듯 두 눈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았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체(體)가 바뀌면 그림자도 바뀐다는 의정불이의 원리를 눈앞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검지손가락을 따라 똑같이 펴지던 그림자를  순간, 나는 내 몸을 싸고 있던 쇠사슬이 일시에 풀어지면서 백 년 동안 접혀있던 날개가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아, 바로 그것이었구나! 의정불이!

얼마 전의 체험이 떠올랐다.


열아홉 살에 대기업에 취업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사회생활은 맨몸으로 가시나무숲을 지나는 것 같았다. 수시로 소리 없이 부딪혀 상처를 받았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울곤 했지만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깊은 슬픔. 그것이었다. 나는 사회생활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피하듯 하고 싶은 공부를 하자고 정하고 아무런 경제적 기반도 없이 월급 12만 원을 포기하고 나왔다. 그러나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갖은 알바로 학비를 버느라 지쳐있어서 순수한 이상을 꽃피우는 곳이 되어주지 못했고, 삶은 선악의 구분도 없이 무질서하기만 해서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지독하게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이렇게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홀로 묻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법화경 강의를 들은 후 내게 물밀듯이 밀려온 환희는 마치 눈앞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기적을 보는 것처럼 나를 뒤덮고 있던 생명의 어둠을 한 순간에 몰아내었다. 기쁘고 기뻐서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법화경을 증명하고 싶다는 비원(秘愿)이 솟아올랐다.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던 내 생명은 구름 위를 나는 듯했다.


그렇게 꿈꾸듯 책을 한 아름 안고 캠퍼스를 걷고 있을 때 우연히 선배언니를 만났다. 마침 일자리가 있어 후배를 찾고 있었다며 내게 외국은행에서 문서작성하는 계약직 알바를 소개해 주었다. 한 달 후 월급이 들어왔다. 31만 원. 놀라웠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60만 원이었으니 경제적인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 것이다. 단지 내 마음의 저변절망에서 환희로 바뀌었을 뿐인데 환경이 변화된 것을 보면서 법화경이 오래된 경전이 아니라 현실에 살아 숨 쉬는 경(經)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체가 바뀌면 그림자도 바뀐다는 의정불이의 경문이 뼈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그 원리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친한 친구를 불러내어 이 마법 같은 장면을 시연하면서 흥분해서 말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환경은 그림자일 뿐이라고. 내가 바뀌면 환경도 바뀌는 거라고. 친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왜 모든 게 나로 인한 것이고 내 탓이냐고 했다. 나와 타인은 각각 독립된 개체인데 왜 나의 그림자라고 하느냐며, 당시 가족의 문제로 힘들어하던 그 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녀를 이해한다. 나 역시 조금 전까지도 나를 바꾸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환경을 바꾸어 그림자를 세워보려 하지 않았던가.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죽하면 지구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은 나의 의지로 얼마든지 바꾸는 게 가능하다.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물리적인 환경도 내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나는 그 후 그곳에서 정직원이 되어 승진하고 퇴직할 때까지 사회생활은 내게 더 이상 감정의 감옥이 아니었다.


모든 열쇠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한테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쁘고 천만다행한 일인가.


살면서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환경을 탓하곤 한다.
인간관계, 사회적 지위나 재력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고 만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의 변화를 통해 환경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의정불이의 철학은 얼마나 혁명적인 가르침인가.


그 어떤 상황도 반드시 타개할 수 있다.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자신의 숙명적인 괴로움은 따라다닌다. 장소를 바꾼다고 그림자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경애가 바뀌면 주위도 자연히 바뀌게 된다. 그것이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원리이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남의 험담을 즐기고, 불평불만 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장 멈추어야 한다. 내 마음이 본래의 깨끗함을 되찾으면 주변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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