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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고집 Aug 24. 2023

고난은 형벌일까?

고난의 의미를 묻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은 없다.

잘나든 못나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든 없든, 건강하든 아니든 항상 고통은 따른다.

고난을 단순히 인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죄에 대한 신의 형벌로 봐야 할까?

고난을  받음을 신의 영광으로 돌린다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까.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면 고통은 사라질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잠시라도 위로가 될까.


불교는 고통에 집중한다.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데 그때 그 화살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려고 한다면 그는 곧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우선 고통의 원인인 독화살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한 시도 살아가기 힘든 존재인데, 어떻게 하면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법화경 법사품에는 이 질문에 대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답을 보여주고 있다.


"약왕은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스스로 깨끗한 업보를 버리고 내가 열반한 뒤에 중생을 가엾게 여겨 악세에 태어나서 널리 이 경을 말하느니라."


깨끗한 업보로 자유로운 인생이지만, 악세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스스로 원해서 고(苦)를 안고 악세에 태어났다는 ‘원겸어업(願兼於業)’의 법리는 놀라움 그 자체다. 원겸어업은 '원(愿)이 업(業)을 겸하다'라고 읽는다. 스스로 원해서 업을 태어났다... 우연히 지구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당위성이 찬란하게 빛나는 구절이었다.


이 혁명적인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차별로 고통받던 사람, 부모를 일찍 여읜 사람, 가난과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법리를 알고부터 존재의 당위성에 용기를 얻어 꿋꿋이 고난을 극복하였다는 체험을 이야기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자신도 물에 빠져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다. 나의 삶이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소망은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게다가 본래 부처이기에 이 모든 괴로움은 극복할 수 있는 괴로움이다. 스스로 원해서 받은 것이기에 한탄도 원망도 없다.


무겁고 고통스럽기만 하던 자신의 숙업이 살아갈 의미가 되고 사명이 되고 삶을 일으킬 동력이 된다. 불교는 이렇게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가르침인 것에 놀라곤 한다.

법화경은 이처럼 나와 더불어 괴로운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한 보살의 훌륭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고 싶다.”

아직도 인도는 신분제도 하에 극심한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기에 간디는 최하층의 천민으로 태어나 그들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들이 받는 모멸을 함께 나누며 불가촉천민을 괴로움에서 구제하고 싶다고 말했다.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법화경은 힌두교 신자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독송하였다고 하니 평화적인 그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시 나의 현실로 돌아와 나의 문제를 바라본다. 나만의 문제로 국한되어 있었을 때와는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인생에 일어난 일들은 반드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너무나 무의미하고 슬퍼서, 살아있다 해도 무기력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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