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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고집 Aug 29. 2023

암탉이 죽비를 치다

순간순간 마음은 길을 잃는다


꼬꼬 꼬꼬꼬 꼬르르륵

뒷산에서 닭울음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바라보니 암탉 한 마리가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었다. 주인이 잡으려다 못 잡아서 누구라도 잡으면 가져가도 좋다는 말이 돌았다. 한 순간에 닭장에서 뛰쳐나와 야생이 되어버린 암탉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들깻잎이 자라서 숲을 이룬 들깨 밭 사이로 먹이를 찾아 숨어 다니다가 동물의 움직임이나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날개를 푸더덕 쳐가며 사라지곤 했다.


닭 잡는데 이골이 난 촌부들조차 금세라도 잡아먹고 싶어 여름내 입 안 가득 침이 고여도, 워낙 날쌔게 달아나는 닭을 잡지 못해 늦가을 들깨를 베고 나면 보자며 벼르고 있었다. 그땐 먹이로 유인해서 고기 잡는 그물을 던져서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그 쫄깃한 육질에 술 한 잔 할 생각으로 다들 몰래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닭은 여전히 아무에게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남은 음식물을 밭고랑에 부어 놓고 돌아서면 어느새 내려와 먹이를 먹고 후다닥 들깨밭을 지나 산으로 달아났다. 저 겁 많은 닭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밤을 지새울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암탉이 안쓰러워 걱정이 되곤 했다.

 

들깻잎이 누렇게 뜨고 들깨가 익어가던 어느 날 아침, 밭을 지나 산길을 오르려다가 눈앞에 흩어져있는 갈색 깃털들을 보았다. 흠칫 놀라 발밑을 보니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닭의 몸체가 산산조각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마치 내 혈육이 사고를 당한 것 같은 충격과 두려움에 싸여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뛰쳐 내려왔다.

밤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매일까?

처음 매를 보았을 때의 섬뜩함을 잊을 수 없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시력의 여덟 배나 좋다는, 닭도 뱀도 놀라운 시속으로 낚아채간다는 매는 필시 검은색이거나 쥐색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 높이 날아가는 매의 색깔을 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따사로운 겨울빛을 띠고 있었다. 누런 황갈색과 불그레한 적갈색들이 어우러진 마른 낙엽과 같이 부드러운 빛이라니 얼마나 섬뜩하고 두려운가.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을 하고 바로 옆에서 생명을 위협해도, 채 인식하기도 전에 먹혀버리는 동물들에게 매는 두려움 그 이상일 것이다.

아니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들고양이의 급습이었을까? 들고양이가 소리 없이 다가가 담장에 앉은 새를 노리고 있다가 어느새 휘익 날아서 순식간에 낚아채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세상은 얼마나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가.

 

암탉은 내게 죽비를 쳤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생하게 외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할 뿐,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신체적 위험뿐만 아니라, 마음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몸을 해칠 정도의 욕망과 분노에 휩싸여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은가. 살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유혹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늪에 빠지게 하는가. 그 유혹들은 대부분 달콤한 얼굴로 찾아와 순식간에 나약한 마음을 휩쓸어 가곤 한다. 내게 있어서 부에 대한 갈망은 가족애라는 뜨거운 사랑의 명분으로 포장되어 내 눈과 귀를 앗아가 버렸다. 돈을 벌고 싶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아이들은 다 자라서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돌아보니 내 가슴속에 무수히 새겨져  있어야 할 사랑하는 아들 딸과의 눈부신 기억들은, 살갗에 채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첫 눈꽃처럼 흔적이 없었다. 아무리 오열한다 해도 이미 사라져 버린 그 소중한 시간들은 절대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뿐인가. 순간순간 돌이킬 수 없는 오해로 스러져버린 관계는 또 얼마나 많은가.


들깨를 베어낸 휑한 벌판에서는 이따금 암탉의 울음소리가 구슬피 들리는 듯하다. 그것은 잊고 있었던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두드리고, 지금 이 순간 내 생애의 전부가 될 1분 1초마다 나의 마음을 낚아채고 있는 건 무엇인지, 덧없는 망상으로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소리 없는 경종이 되어 나를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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