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 신규민, 바지, 스카이 페레이라, 조나스 블루, 아르카.
무덥고 습했던 7월 28일 일요일,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어두운 날씨에도 신세대 음악 팬들은 우의와 우산을 챙겨 들고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더케이호텔(The K Hotel) 일대서 개최된 2019 ‘서울 세션즈(Seoul Sessions)’ 페스티벌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올해 서울 종합운동장 일대 대공사로 흔치 않아진 서울에서의 음악 페스티벌이라는 점, 독창적이고 신선한 신예 아티스트들이 대거 출연한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이 악천후에도 공연장을 찾았다.
넓은 주차장 일대와 다목적 공연장, 잔디 광장을 활용해 만든 스테이지와 여가 공간은 안정적이었다. 기상 상황만 좋았다면 완벽했을 텐데 악천후가 아쉬웠다. 15시쯤부터 쏟아진 비는 잠시 후 우의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폭우로 돌변했고, 잔디 광장이 질척이는 뻘밭으로 변하며 ‘록 페스티벌의 치열한 전투’를 대비하지 못한 관객들에게 불편을 안겼다. 그나마 사이드 ‘돔 스테이지’가 이름대로 비를 피할 수 있었기에 최악을 면했다.
이 날 ‘서울 세션즈’는 ‘돔 스테이지’와 ‘그래스 가든’ 두 스테이지로 나뉘어 진행됐다. 젊은 해외 싱어송라이터부터 인기 디제이, 서울 언더그라운드의 쉐이드 서울(Shade Seoul), LGBTQ 커뮤니티 네온 밀크(Neon Milk)를 중심으로 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거대한 클럽을 상상한 팬들에게도, 음악 페스티벌의 낭만을 바란 팬들에게도 만족스러운 구성이었다.
첫 라이브 공연을 펼친 아티스트는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상을 수상한 수민이었다. 지난 7월 19일 새 EP <OO DA DA>를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수민은 더운 날씨에도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작년 정규 데뷔작 <Your Home>의 수록곡 ‘In dreams’, ‘너네 집’, ‘I hate you’와 신보의 ‘Shaker’, ‘Meow’, ‘Stardust’를 골고루 선보이며 독특한 개성과 퍼포먼스로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옆 잔디 광장에서는 디제이 신규민(SINQMIN)의 디제이 셋이 펼쳐졌다. 디제이와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음료 회사 레드불에서 개최하는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에 세 번째 한국인으로 초청받기도 한 그는 지난해 EP <Resilence>와 올해 <Stadium>을 발표하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 올리고 있다. 공격적인 고유 스타일 선곡은 물론 다채롭고 흥겨운 비트를 통해 관객들의 흥을 돋웠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며 호응을 유도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다시 돌아간 돔 스테이지는 ‘서울 퀴어문화축제’를 연상케 했다. 나나(Nana), 쿠치아(Kuciia), 비타 믹주(Vita Mikju) 등 드랙퀸들과 하우스 오브 티즈(House Of Tease)가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황과 낯섬보다 열띤 환호와 열광이 있어 안심이었다. 이 날의 헤드라이너 아르카(Arca)를 위한 예행연습과도 같았다.
1997년생 미국 가수 바지(Bazzi)는 대표곡 ‘Mine’이 빌보드 싱글 차트 11위까지 오르며 혜성같이 등장한 싱어송라이터다. BTS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추천을 받고 가사 일부분을 인터넷 밈(Meme)으로 만든 그는 사실 4년 전 한국 대형 기획사의 작곡 작업을 통해 음악을 시작했다. 공연 시작과 함께 바지는 이 사실을 밝히며 ‘음악을 시작한 도시 서울에서 공연할 날을 꿈꿔왔다. 정말 감격스럽다’며 한국어로 ‘사랑해’, ‘애기야’를 말하는 등 아낌없는 애정을 보였다.
스테이지를 가득 메운 팬들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다. ‘Paradise’, ‘Gone’으로 무대를 열며 멋진 퍼포먼스와 목소리로 팬들을 사로잡았고, ‘Alone’에서는 일렉 기타를 메고 나와 솔로 연주를 선보였다. 어쿠스틱 기타 플레이어와 함께 마룬 파이브의 ‘Sunday morning’, 래퍼 드레이크의 ‘Hold on, we’re going home’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커버하기도 했다. 단독 내한 공연처럼 무대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가지며 다른 성격의 공연을 선보인 것도 노련했다. ‘Mine’의 합창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바지, 인기는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바지의 뒤를 이어 영국의 디제이이자 프로듀서인 조나스 블루(Jonas Blue)가 무대를 이어받았다. 리암 페인, 조나스 브라더스의 조 조나스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이어가며 이름을 알린 이 트로피컬 하우스 디제이는 올 3월 걸그룹 아이즈원과의 콜라보레이션 ‘Rise’를 발표하기도 했다.
소울풀한 보컬과 흥겨운 리듬의 대표 트랙을 선보인 그의 선곡에 팬들은 춤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페스티벌의 흥을 한껏 즐겼다. 진흙밭이 되어버린 잔디 광장이었음에도 춤사위는 그칠 줄을 몰랐다. 화려한 불꽃놀이와 게스트 보컬이 무대를 돋궜고, 마지막 태극기를 들고 등장한 조나스 블루의 모습에 모두가 열광했다.
이하이의 무대는 관객으로 가득했지만 굳이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의 무대를 보고 싶진 않았다. 이후 이 날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스카이 페레이라(Sky Ferriera)의 무대를 기다렸다. 약간의 지각 후 돔 스테이지에 등장한 그는 파워 로커였다. 모델과 배우, 싱어송라이터를 겸하며 지드래곤의 ‘Black’에도 피처링했던 다재다능함을 생각했는데 완벽한 오산이었다. 습하고 더운 날씨에도 항공 점퍼를 걸치고 나온 그는 1980~90년대 스타일의 거친 록 밴드와 함께 화끈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2013년 여러 매체로부터 올해의 앨범 후보로 손꼽힌 <Night Time, My Time>의 수록곡이 주를 이뤘다. 1985년 많은 사랑을 받은 밴드 틸 튜즈데이(Till Tuesday)의 대표곡 ‘Voices carry’를 시크하게 커버하기도 했다. 무대의 화염 장치에 깜짝 놀라 노래를 다시 부르는 모습에서 시크함 속 귀여움(?)도 발견했다. 빠른 단독 내한과 차기작을 기다려본다.
대망의 마지막 순서로 아르카(Arca)가 무대에 올랐다. 아이슬란드 출신 비요크(Bjork)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린 아르카는 칸예 웨스트와 다프트 펑크, FKA 트윅스 등 저명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명성을 쌓아 올린,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티스트다. 2017년 발표한 데뷔작 <Arca>는 그 해 평론 종합지 메타크리틱(Metacritic)에서 100점 만점에 90점을 받으며 평단의 일치된 호평을 받았다.
평소 과감한 퍼포먼스와 즉흥적인 연주, 독특하고 파괴적인 라이브로 유명한 아르카의 무대는 백문이 불여일견. 브래지어와 스커트, 헤어핀과 쇼핑백을 들고 무아지경의 비트를 연주하던 그는 스테이지 위에 누워 관능적인 몸짓을 뽐내고, 디제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며 장내를 열광케 했다. 레이저 포인터가 장착된 안대를 쓰고 컴컴한 무대 위 홀로 빛을 내뿜으며,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그의 모습은 파격 그 자체였다.
기괴한 백스크린 영상과 함께 쉴 새 없이 무대를 꾸미던 아르카는 ‘한국에서의 첫 무대기도 하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긴장을 많이 했는데, 멋진 호응을 보내주어 고맙다.’며 만족스러운 소감을 밝혔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도 최선을 다해 무대에 임한 그는 이 날 새벽 이태원에 위치한 클럽 케익샵(Cakeshop)에서 애프터 파티까지 선보였다.
늦은 11시, 끝까지 아르카를 위해 스테이지를 지키고 서있던 관객들과 일말의 연대감을 느끼며 바삐 무대를 빠져나왔다. 대중교통 막차에 몸을 싣고 도심형 페스티벌의 장점을 다시 한번 느끼고 나서야 같은 시각 벌어진 ‘홀리데이랜드 페스티벌 사태’와 앤 마리의 무료 콘서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악천후에 고생하긴 했지만 소박하고 깔끔한 진행, 확실한 콘셉트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티스트들의 '노쇼'와 '패싱'도 없었다.
2017년 래퍼 위즈 카리파를 필두로 힙합 페스티벌의 면모를 보였던 서울 세션즈는 2019년 보다 폭넓은 아티스들과 확실한 언더그라운드 기조, 다양성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획득했다. 거대 페스티벌 사이 소소하고 확실한 '소확행'을 만족시킨 페스티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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