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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r 12. 2017

액트 오브 킬링

역사의 평범한 학살자, 역사의 평범한 피해자.


< 액트 오브 킬링 >은 인도네시아의 어떤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1960년대 독재 정권 아래서 '빨갱이 사냥'을 도맡았다. 공산주의자라 찍힌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글려가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으며 그 시체는 아무 데나 버려졌다. 군사 정부의 공무원 갱단이 된 그들은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거리낌 없이 사상 청소를 하고 다녔다. 4-50년이 지난 지금, 노인이 된 그들은 자신의 공적을 다룬 영화를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그 시절 '무협 담'을 신나게 털어놓는다. 


평범 뒤에 숨은 광기는 모두를 경악으로 몰고 간다. 동네 어르신들처럼 보이는 그들은 친절하게 옥상으로 올라가 철사로 사람 목을 따는 과정을 상세히 안내한다. 온 정글을 불바다로 만들면서 사상범을 추적하는 일명 '자치 방범대'들을 재현할 땐 좀 더 리얼한 장면을 재차 요구한다. 주민들은 그들이 무서워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국가는 이들을 자랑스럽게 역긴다. 과거는 반성할 일일 아니라 헌신했던,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무려 100만 명이 학살당한 인도네시아의 거리 풍경은 언뜻 평화롭다. 정재계 각종 인사들과 시간을 보내며 부유한 생활을 즐기는 안와르 콩고와 그 집단도 딱히 문제 삼을 거리 없을 평범한 삶을 산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나올 리가 없고 과거는 이미 지워진 지 오래, 발전하는 사회상은 그들의 헌신 덕분.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촬영과 회상을 통해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그들이 과거의 범죄를 대하는 태도를 공개한다. 너무도 뻔뻔스러운, 아니 왜 그 역사에 의문을 가져야 하느냐는, 무의식적 잔인함이다.



이 정도의 야만이 판을 치진 않아도 한국 또한 그런 류의 시기를 겪었다. 거리마다 경찰과 군인이 일상을 검열하고, 대한 교정에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 액트 오브 킬링 >처럼 그런 가해자들이 떳떳이 돌아다니면서 옛날이야기를 맘 놓고 늘어놓을 수 있는 사회는 아니다. 완전히 늦어버리기 전에 윗 세대들이 들고일어났고, 그들은 고도성장과 정권 안정보다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오늘날은 기묘하게도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을 추종한다. 우리의 현대사는 희생을 강요하면서, 그 인간 연료를 불태워가면서 성장했다. 게릴라들이 득실거리는 열대 정글 속으로, 탄광 속으로, 작열하는 태양의 사막 벌판으로, 미싱 공장으로, 가발 공장으로, 시체 닦는 이국으로. 청춘을 다 바쳐, 그러니까 정말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국가에 헌신하고 자식 세대를 길렀다. < 국제시장 >의 황정민이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았지 않느냐고 해맑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은, 그 세대의 희생이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궜다는 자부심에서다.


< 국제시장 >을 보고 눈물 훔쳤던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에게까진 그 시절이 자랑스러운 부모님들의 한 때로 기억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역사는 현재를 끊임없이 침범해왔다. 1979년 유신 정권은 끝났지만 그 여독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친 그 세대들에게 유신은 신념이고 상징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지막 창구.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희생당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줄 마지막 사람. 그래서 4년 전 몇 퍼센트 박빙 승부가 펼쳐지자 말 그대로 우르르 몰려가서 '밀어줬던' 때와, 거리로 나섰던 '가스통'과, 어버이 어머니들의 연합과, 결국에는 태극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태극기.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학살자 안와르 콩고는 가끔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의 악몽에 시달린다. 한국의 피해자들은 베트남에서만 빼면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그러나 시달릴 악몽은 더 많다. 더 끔찍한 건 자신들의 성과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사회, 그리고 '요즘 젊은것들'이다.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안 하는 것들이 나라 욕을 하고 취직 걱정을 한다.  이젠 거리로 나서기까지 하면서 우리들의 공주님을 권좌에서 몰아내려 한다. 안돼!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한다. 희생당한 청춘이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영화 < 26년 >에서 전 대통령을 악착같이 경호하는 경호실장 마상렬은 종국에 이렇게 울부짖는다. '당신이 내 삶을 모두 가져갔으니까, 당신이 없어지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내 삶을 증명해줘야 해.'  


역사를 계속 끌고 가려고 하는 세대가 그 후손들의 앞길을 막아선다. 그 역사는 자신들의 삶을 고되게 했던 것이다. 그 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악착같이 일했던 세대들은 다음 날 끼니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이 너무도 고마울 것이다. 이 기적과도 같은 발전 과정을 단 한 명의 지도자의 공으로 섬겨온 것이다. 그만큼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고, 한국인은 참된 지도자를 굶주려했다.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왜 이렇게 내려왔는지, 공주님이 청와대에서 끌려 나오려 하는 이 시점에 유혈사태까지 일으키면서 절규하는지에 대한 배경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고도성장의 희생자고, 새마을 운동의 희생자이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꾸 망령을 섬기며 거리로 나서는 모습은 일견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끝낼 때가 됐다. < 액트 오브 킬링 >처럼 야만이 자꾸만 일상으로 넘어오려 하는 지난 4년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너무도 크게 쪼개지고 있다. 잘못 뿌리내린 역사가 이토록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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