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09. 그녀가 들어왔다.
배정환
아침부터 인테리어라고 쓰인 1톤 트럭이 인도까지 올라왔다. 태성은 가게 유리문을 닫으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듯했다. 드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카페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누가 될까 살짝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도 서로 먹고사는 문제로 시작하는 자영업인데 냉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일주일 전부터 인테리어 사장이 일주일간 조금 시끄러울걸라며 양해를 구하긴 했다. 꽃 가게가 생길 거라고 했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단골 여성 손님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사장님 오늘은 좀 시끄럽네요. 이 커피 테이크아웃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옆집이 공사하느라... 다음에는 조용할 겁니다."
"괜찮아요."
한껏 웃어주는 단골에게 미안한 웃음을 던졌다. 손님이 나간 문으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웨이브 진 갈색 긴 머리에 단아하게 화장을 한 30대 여성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혹시 카페 사장님 되시나요?"
"예. 음료 주문하시겠어요?"
"아니요, 꽃집 오픈하는 사람인데요. 시끄러워서 죄송해요. 죄송해서 떡을 좀 사 왔어요. 손님들과 나눠드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
꽃집 여사장은 한가득 떡이 담긴 봉투를 가운터에 올렸다. 그래도 이기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안심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카페 오픈하며 주변 분들에게 누를 끼쳤는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성은 꽃집 사장의 얼굴에 자꾸만 눈이 갔다.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손가락을 봤다. 꾸밈없는 손톱과 반지 없는 손가락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다행이네요."
"네? 뭐가요?"
태성은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그나마 덜 시끄러워서 다행이라구요."
두 사람은 간단하게 통성명을 했다. 이름이 이화정이라 했다. 태성은 꽃 화자가 들어가는 걸 보니 꽃집을 할 운명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저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 드릴게요. 이젠 이웃인데요."
한사코 거절하는 꽃집 사장님에게 커피를 정성껏 내려 주었다. 카운터 가까이 앉아 있는 그녀에게 자꾸 눈이 갔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말아 쥐고 따뜻함을 느끼는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꼬은 다리를 감싸는 긴치마도, 굽 없는 구두도 닮았다.
"커피가 너무 좋아요. 바로 옆에 카페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매일 애용해야겠어요."
"옆집은 50% 할인입니다."
태성은 자기도 모르게 할인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멋쩍게 웃어넘기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딸, 수민이가 들어왔다. 하필 이 순간에 딸이 들어왔을까? 태성은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었다.
"수민아, 옆집 사장님이셔 인사해."
"어머, 딸이 이쁘네요. 엄마가 미인인가 봅니다."
수민이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네, 엄마가 무척 미인이세요. 그래서 우리 아빠가 엄마를 엄청 좋아하시죠. 엄마는 미인대회도 나갈 정도였어요."
당돌하게 나서는 수민이를 보며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은 언제 나오세요? 궁금하네요."
태성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수민이가 자르고 나섰다.
"엄마가 큰 사업을 하셔서 너무 바쁘세요. 카페는 아빠와 제가 하고 있어요. 나중에 나오시면 제가 인사시켜 드릴게요."
화정은 수민이의 당돌함이 나쁘지 않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래, 꼭 소개해 줘. 아줌마랑 친구 하면 좋겠다."
"아줌마, 혹시 결혼하셨어요?"
태성은 당황스러워 나섰다.
"수민아, 그런 질문하는 거 아니야. 처음 뵌 분들에게 무례한 질문은 안되지."
화정은 괜찮다며 태성에게 손짓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성이 더 궁금했다.
"아줌마는 아직 솔로야.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났어. 좋은 사람 있으면 수민이가 소개해 줄래?'
다시 한번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버릇없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화정이 지혜로워 보였다. 딸을 보고 있지만, 조용할 말투와 자연스러운 미소는 이미 태성을 향했다.
화정이 돌아가고 수민이가 앞치마를 두르며 말했다.
"아빠, 정신 차려!"
"내가 뭘?"
"얼굴에 다 보여. 엄마 잊지 말고."
"아니야...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얼굴도 성격도 엄마를 꼭 빼닮은 수민이가 태성을 쏘아봤다. 수민이가 옆에서 설거지를 도우면 마치 아내와 일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언제 우리 딸이 이렇게 컸을까?
일주일이 지나고 꽃집은 인테리어가 끝나고 오픈행사를 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조용해졌다. 태성은 커피를 정성껏 내려 꽃집을 찾았다.
"오픈한다고 해도 찾아뵙지도 못했네요. 커피 한잔 하세요."
화정은 태성을 반갑게 맞아주며 의자를 하나 내주었다. 복층을 올려 윗층에도 화분이 올라가 있었다. 아래층에는 작업대가 있었고 안쪽으로 커튼이 드리워져 쉬는 공간처럼 보였다. 핑크빛 벽과 꽃이 참 잘 어울렸다.
"저, 꽃다발 하나 만들어주세요. 장미를 좀 많이 넣어서요."
"사모님 가져다 드리게요? 무슨 날인가요?"
"네... 그냥요. 가게 오픈했으니 뭐라도 팔아드리고 싶어서요."
화정은 남자가 안아도 버거울 정도로 큰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커피가 반값이라고 하셨으니 저도 꽃이 반값입니다."
태성은 감사 인사를 하고 카페로 돌아왔다.
"사장님 무슨 꽃이에요?"
도성이 놀라서 카운터에서 나왔다.
"엉, 옆집에서 샀어. 뭐라도 팔아드려야겠기에."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데요. 어디 쓰시려고요. 가게 인테리어 하시게요?"
"몰라. 자네 가져갈래? 여자 친구 없어?"
"감사히 받겠지만, 그래도 너무 큰데요. 꽃집 사장님께 가져가서 반으로 나눠달라고 해야겠어요."
"와이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다시 가져가면 내가 뭐가 되나? 그냥 다 가져가."
"꽃집 사장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이미 사장님 혼자 산다고 다 말했는데..."
태성은 창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가만히 앉았다. 거짓말을 하다 들통난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네는 별소릴 다했네. 그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었나?"
도성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장님 혹시 제가 비밀을 말씀드린 건가요? 혹시...."
"아니야. 자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뭐죠?"
더 이상 이야기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 태성은 카페를 나왔다. 한참을 걸으며 생각했다. 태성이 혼자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누군가를 사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화정을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가게가 안정되니까 별 생각을 다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