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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동하는독서 Dec 25. 2023

10.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행복의 조건>

10.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배정환


화정이 마음에 들어오고 나서 유독 태성은 딸이 신경 쓰였다. 점점 아내를 닮아가는 딸을 보며 아내가 생각났다. 화정에게 다가가는 마음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이런 찜찜함은 무엇일까? 수민이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지만, 아내와 연애할 때처럼 함부로 다가설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전 지방에서 근무할 때 아내를 처음 보았다. 그곳에 오래 근무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방에 있다 보니 어머니를 자주 찾아뵐 수 없어 용돈을 이체하곤 했다. 통장을 만들러 시내 농협에 갔다가 아내를 봤다. 쌍꺼풀이 얇게 그려진 동그란 눈이 참 이쁘다고 생각했다. 하얀 제복 때문에 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느껴졌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마치 물건을 훔치다 발칵 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통장을 만드는 그녀의 손에 빨간 봉숭아 물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그녀 뒤에 걸린 시계와 달력을 보는 척했다. 그녀의 가슴 명찰에서 '유은지'란 이름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 눈만 감으면 태성의 머릿속은 그녀의 얼굴로 가득했다. 특별한 볼일이 없어도 돈을 입금하러 농협을 나아갔다. 외출증 끊는 횟수가 늘어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결혼은 했을까? 사귀는 남자는 있을까? 말을 걸어 볼까? 거절하면 어쩌지? 도저히 말 걸 용기도 없으면서 거절을 걱정하고 있었다. 입금만 하면 이상할 것 같아 적금도 들고 인터넷 뱅킹 서비스도 만든다고 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 청원 경찰이 다가왔다.

"혹시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태성은 청원 경찰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며칠 전부터 태성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행동이 어색하고 머뭇거리는 게 너무 수상해서 유심히 관찰 중이었다고 했다. 청원 경찰의 눈에 보였다면 은지 눈에도 보였을 거라는 희망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태성은 정중히 사과했다.

"실은 2번 창구 직원분과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서요."

청원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반대편 거울에 보였다. 그 말을 하면서도 태성의 얼굴을 금세 빨개졌다. 돈 만지는 곳에서 이게 할 말인가 싶었다.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쳤네요."

청원 경찰은 미소를 지으며 태성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저녁 6:00에 길 건너 카페에서 기다리세요. 아마 정리하면 6시 정도 될 겁니다. 제가 그리로 가보라 할게요. 용기를 내세요."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휘저었다.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청원경찰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용기를 주었다.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태성은 서둘러 퇴근하고 카페에서 기다렸다. 정말 그녀가 나올지 무척이나 궁금하기도 했다. 청원 경찰이 아무 말 없던걸 보면 아직 결혼 전이란 건 확실했다. 만약 나오지 않으면 다시는 농협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창문 너머로 길을 건너는 그녀가 보였다. 꿈만 같았다. 그녀가 정말로 이 카페로 들어오고 있었다.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성은 들어와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은지 씨..."

"아~ 그분이시구나. 그림 전자 직원분. 왜 직접 말 안 하셨어요?"

그녀는 청원 경찰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금방 태성이란 걸 직감했다고 했다. 용기가 부족해 망설였던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남자답지 못해서 혹시 실망한 것은 아닐까? 용기가 부족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누가 만나자고 했는지 금방 알겠던데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머리를 풀고 청바지에 흰 티를 입은 그녀는 더 어리게만 보였다.

"저를.. 알아봐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태성은 은지와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낯설었던 지방 동네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이후 자주 만났다. 은행이 일찍 끝나는 것 같아 보여도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면 저녁 시간이 훌쩍 넘기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 작은 동네라서 회사에 소문이 나는 건 금방이었다. 회사 내 많은 직원이 농협직원 은지를 알고 있었다. 다들 마음에만 두고 있으면서 왜 접근하지 못했을까? 태성은 직원의 부러움을 받았다.


태성은 업무가 바빠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였지만, 최대한 근무시간을 줄여보려고 애썼다.

"태성 씨, 어제 올린 계획서 다시 검토 좀 해봐요. 위에서 다시 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요즘 정신이 없는 거 같아. 왜 이리 실수가 많아?"

부장님이 태성을 불러 업무의 부족한 점을 꼬집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요."

"연애도 좋지만, 일은 일이잖아.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줘."

"네. 죄송합니다. 어서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연애를 시작하고 태성은 처음으로 돈이란 걸 모으기 시작했다. 은지가 나서서 적금도 들고, 씀씀이를 체크했다. 돈에 관련해서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은지를 보고 태성은 생각했다.

'이 여자면, 결혼해도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다.'

회사 내에서도 태성이 바뀌었다고 했다. 술도 줄이고, 담배도 끊었다. 은지가 담배 냄새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태성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 자취방에서 지내는 총각이 어느새 말끔해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발도 자주 하고, 안 바르던 스킨, 로션도 발랐다. 은지가 사주는 옷을 입고 출근하면서 사람들이 새신랑이라고 놀려댔다. 여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태성이 지방 근무가 끝나고 다시 경기도로 올라올 때쯤 연애를 끝내기로 했다. 첫 데이트를 시작하고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남자와 여자가 잘 맞벌이하면 행복한 날이 이어질 거라 생각하며 신혼에 인생계획도 세웠다. 아내는 돈 관리에 관해서는 무척이나 꼼꼼한 편이었다. 은행에 근무해서 그런지 허투루 쓰는 돈이 없었다. 남자는 그런 아내가 무척이나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딸을 낳고 어린이집을 보내고 나서 아내는 남자와 상의할 것이 있다고 했다.

"나. 은행 퇴직하려고, 이제 나이도 있어서 계속 다니는 것을 어려울 것 같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빵집 하나 내 볼까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남자는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은행 다니는 아내가 더 좋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좋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도 도울 테니까 열심히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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