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 연습

은퇴 후의 삶을 위한 루틴

by 이야기공간 낄낄

“글은 읽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

평소의 내 소신이다.

잘 쓰는 사람들의 글이 널리고 널렸는데 재능도 소질도 없는 나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글쓰기가 번거롭고 싫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 보고서나 기획안을 쓰는 경우엔 마감일 하루 전에 부랴부랴 썼다. 한시가 급하니 집중도 잘 되고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제출한 마당에 신경 쓸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신경쓰지 않은 보고서의 소제목 번호는 중복이 기본이었다. 1. 2. 3. 3. 4. 4.... 신기하게도 중복된 번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용 중복도 기본 사항.

쓰는 사람도 대충이지만 읽는 사람도 대충 읽는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압축해서 읽지 않으면 시간이 남아나질 않는다.


보고서나 기획안은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이 썼지만 사람들에게 읽히는 (궁금한 내용이 가득하고 글맵시가 뛰어난) 글을 쓰기는 어려웠다. 아니 그런 마음을 가진 적도 없었다.


나는 공대를 다녔다. 써야 할 것들은 많았지만 수식이 대부분인 그런 공부. 책을 몇 줄 읽기는 했지만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눈만 높아졌을 뿐이다.

글을 쓸라고 치면 어디서 주워들은 표현을 쓰고 싶어서 내용이 묻히고 멋을 부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 오직 나만의 문장력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글.


읽히지 않는 글

내용은 없고 끌리쉐만 잔뜩, 마치 지피티가 쓴 것처럼 뻔한 표현만 가득, 지루한 내용과 교훈으로 가득 찬... 식상함의 잡탕. 아... 그런 글은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실화’가 아니라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따위의 글(내가 자주 쓴다), 그저 그런 일상을 포장한 글(퇴근길에 커피를 한 잔 사서 원숭이와 나눠 먹고, 악어네 가게로 가서 이빨을 갈며 놀았다...) 일상은 어차피 무색무취. 뻔한 상황을 읽히게 만들려면 무지막지한 내공이 필요하다. 김훈이 괜히 김훈이 아니고 소로우가 괜히 소로우가 아니다.


그럼 무엇을 써야 읽히는가!

그게 내 고민이다. 아니 좀 전까지는 읽히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인간이란 원래 이율배반의 동물이다. 몇 줄 위에 그런 얘기를 내가 썼더라도 그건 몇 분 전의 나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읽히는 글의 특징은 잘 팔리는 물건과 다르지 않다. 첫째, 신기하고 도움이 되는 내용. 둘째, 글의 흡입력. 셋째, 매력 있는 문체. 넷째, 독특한 상상력. 다섯째, 서점 매대의 포지션. 여섯째, 읽기 쉬운 구성. 일곱째, 기가 막힌 제목. 여덟째, 책표지 디자인. 아홉째, 책의 두께. 열째, 운빨

이 모든 조건에서 대략 서너 가지 조건이 맞으면 읽히는 글이 된다.

뭐... 쉽다. 열 가지 조건 중에 서너 개만 이룰 수 있으면 되니까 야박한 조건은 아니다.

내가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마음을 바꾼 이유는 읽히는 글의 조건이 그리 혹독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표지와 운, 그리고 두께만으로도 팔리는(읽히는) 책을 만들 수 있으니 100권쯤 쓰다 보면 한 권은 되지 않을까. AI를 활용하면 천 권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상상력이 문제지 글이야 뭐... 라는 생각도 든다.

글을 쓰는데 돈도 들지 않는다. 클로드랑 제머나이 같은 수정도구로 편집자 인건비를 대폭 줄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부랄친구의 작가선언이 계속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블로그 작가가 돼 볼까 해”

“오! 멋지다! 은퇴 후에 좋겠는데!!!“

그래... 은퇴 후에 할 수 있는 일.

혼자서 돈 들이지 않고 리스크 없이 해낼 수 있는 일. 심지어 정치인 유시민 씨도 하지 않는가.


나라고 못할 게 뭔가. 잘 된다는 보장이 없어도 루틴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집에 연구실도 만들어 놨고, 은퇴를 앞둔 선배도 써보라고 용기도 주고 하니까.


세상은 1, 2, 3, 3, 4, 4번이 뒤섞여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퇴근길에 원숭이와 악어를 만나도 무심히 지나친다. 이 무색무취한 세상에 나 같은 삐딱한 관찰자가 던지는 농담 한 조각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진짜 마음에 드는 건 출연료, 원고료, 출장비 따질 필요 없이 노트북만 있으면 된다는 거다. 내가 만들어 놓고 나도 보기 애매한 영상물을 내놓는 비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니까.


글쓰기엔 돈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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