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기 Oct 25. 2024

07. 오라, 달콤한 건초염, 안구건조증, 거북목이여

웹소설 작가의 만성질환과 장비들

얼마 전 한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봤다. 의자에 앉은 만화가가 허리를 구부리고 그림에 매진하는, 별 특징 없는 모습이었다. 책상에 코를 처박고서 펜을 움직이는 인물을 보며 생각했다. 미친, 척추 소중히 써라!


주인공은 침식조차 잊고서 밤낮으로 만화를 그렸다. 주간 연재 일정을 맞추려 수업도 소홀히 하고 노동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열정보단 섬뜩함이 먼저 느껴졌다. 저렇게 생활 패턴이 무너지면 조만간 죽을 텐데? 현실적인 걱정을 솟아오르려는 차- 진짜 죽었다.


아니, 농담이다. 죽진 않았고 혈뇨를 본 뒤 실신했다. 간 수치 이상으로 입원한 주인공은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마감 일자를 맞추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다. 


미친 새끼…….



웹 콘텐츠의 작업 속도는 기존 매체와는 다르다. 종이책과 달리 매일 연재가 기본인 웹소설은 하루 최소 3300자에서 5000자 사이의 분량을 완성해야 한다. 업로드 주기는 작가가 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쉬는 날이 많을수록 연독률이 떨어지니 연재 중심의 작가들은 적어도 주 5회는 고수하려고 한다.


달리 마감이 급하지 않더라도 평균 작업량이 많은 편이니 몸은 대부분 미세한 과부하에 걸려 있다. 무리하지 않을 만큼 여유롭게 집필하면 참 좋겠지만…… 속도가 곧 생명인 업계에서 늦장을 부리긴 쉽지 않다. 물론 1년에 한 작품만 내도 먹고 살 만큼 인지도가 있거나 연금작이 있어 집필 속도를 조절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일단 난 아니다.


양 손목을 보호대로 무장하기는 예사. 인체공학 키보드, 손목을 받칠 팜레스트, 모니터 시야각을 올려줄 모니터 암, 버티컬 마우스, 척추를 확실히 잡아준다는 고가의 의자까지- 통증을 완화해 준다는 장비 간증은 흘러넘친다. 여러 예술가가 입 모아 추천하는 250만 원짜리 의자의 상세 페이지를 훑어보니 의문이 생겼다.


그냥 척추가 안 무너지게 코어를 단련하면 안 될까……?


100만 원 안쪽이라면 모를까 이만한 가격이면 개인 PT를 받으며 속 근육을 강화하는 게 장기적으로 나아 보였다. 지인의 간증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터질 디스크가 1년에 한 번 터진다고는 하지만……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장비로 보완한다고는 하지만…….


가혹한 업무 환경에 마음먹으면 집 현관조차 안 나갈 수 있는 직종이다 보니 일하다 보면 쉽게 모니터에 코를 처박고 몇 시간이나 앉아 있게 된다. 나 또한 의식적으로 작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분리하기 전까지는 한쪽 다리를 이리 꼬고 저리 꼬며 몇 시간이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덕분에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번갈아 방문하게 되었고.


Q. 그러면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지금은 괜찮나요?
A. ……ㅎ


신체든 정신이든 계속 쓰면 아프다. 몇 시간씩 앉아 있는 것보다야 틈틈이 일어나 물도 마셔주고 스트레칭도 해주는 편이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직업병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게다가 나는 직업은 물론이거니와 취미조차 손가락과 손목을 많이 사용해야 하는 터라 휴일에도 통증에서 해방될 수 없다. 모 친구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누워 있어’라고 했지만……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단 말인가. 책이라도 한 장 넘겨야 성에 차는 나로선 너무 어려운 요구다. 그러니 이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에세이를 쓴답시고 또 한글 창을 열었겠지만.


써먹기만 하지 제대로 기름칠 하나 해주지 않은 근육은 운동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을 때 반드시 걸리고 만다. 나의 발레 선생님은 내 몸을 잡아줄 때마다 ‘어깨가 많이 말려 있다’며 내 관절을 재조립하려 한다. 코어가 부족해 목에 힘이 들어가고 승모가 굳는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줄줄 외울 정도다.


선생님께 올바른 자세를 익혀 돌아가도, 다시 의자에 앉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어깨와 목은 자꾸 앞으로 빠지고, 눈은 시큰거리고, 그 와중에 손가락이나 손등이나-높은 확률로 둘 다- 아파오고…….


안 써야 낫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체득했으나 먹고 살려면 키보드에 손을 올려야 하니, 쇼핑 위시리스트만 들락날락하게 된다. 사용 후기는 다음과 같다.


1. 손목보호대: 없으면 못 삼. 엄지와 손등 일부까지 감싸주는 디자인 추천
2. 모니터 거치대: 모니터는 반드시 눈높이에 맞춰라
3. 무접점 키보드: 자판이 가벼울수록 오래 칠 때 낫다
4. 팜레스트: 키보드와 세트. 없으면 손목 꺾임
5. 버티컬 마우스: 무조건 추천. 훨씬 덜 아픔
6. 스탠드: 여러 작가님들이 쓰기에 사 봤는데 그냥 방을 환하게 해두고 살자
7. 책상 팔 받침대: 없으면 팔 빠짐
8. 발 받침대: 없으면 앉는 자세 난리남.
9. 손 마사지기: 아프기만 하고 도움 안 됐음
10. 눈 마사지기: 정작 마사지는 안압이 높은 사람이 하면 안 된대서 온열 기능만 씀. 눈 따끈따끈 좋음.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느낌


이 외에도 너무 사고 싶으나 우선순위에 밀려 장바구니에만 담아둔 아이템도 많다. 앉은키와 체중에 따라 맞춤 제작된다는 의자, 정형외과에서 종종 쓴 파라핀 치료기, 블루라이트 차단 필름, 목 마사지기 등등.


이런, 정리하고 보니 ‘이걸 살 돈이면 개인 PT를 어쩌고’ 했던 의문이 완전히 해결된다. 물론 위시 리스트를 모두 구매한다고 해도 석 달 치 개인레슨 비용조차 안 되겠지만.


돈이든 시간이든 투자해서 삐걱거리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겠다는 시도가 참 가상하고 서글프다. 삶 속에서 일의 균형을 잘 맞추려 분투하지만 가끔은 넘어진 채 그대로 앓는 소리만 내기도 한다.


그래도, 뭐…….


일단 일어나서 기지개라도 켜자. 쭈우욱.

이전 07화 06. 출바출 담바담 작바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