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삶으로
OECD 자살률 1위의 나라.
도시는 언제나 깨어 있지만, 그것은 생동이라기보다 버팀에 가깝다.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반짝이는 네온사인 아래, 사람들은 숨만 쉴 뿐, 살아 있다는 감각은 점점 무뎌졌다. 나는 이 도시를 ‘수동적 자살자들의 도시’라 불렀다.
죽음을 결심하진 않았지만, 살아 있음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그저 매일을 견디는 나. 그 말은 아프지만, 다시 살기 위한 모멘텀이었다.
이 연작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놓친 것과 이룬 것은 무엇일까?”
능동적 죽음에서 수동적 삶으로, 그리고 다시 능동적 주체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도시의 풍경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피로와 기대가 뒤섞인 얼굴은 마치 아스팔트 틈에서 핀 풀과 같았다. 그 속엔 포기와 희망, 체념과 열망이 동시에 얽혀 있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빛의 도시에서, 나는 좌표에 찍힌 점처럼 존재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마음이 수평에서 자리 잡듯이 글을 써 나갔다. 시간이 흐르며 생각은 더욱 단단해졌다. 수동적 삶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숨 쉬는 증거라는 걸.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에도 심장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그 작은 박동이 나를 이끌었다.
내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잣대들, 정상과 비정상, 성취와 실패, 효율과 낭비. 그러나 진짜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비정상이라 불리는 궤적에도 고유한 리듬이 있었다. 지하철 2호선처럼 돌고 돌아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듯, 어쩌면 나는 멈춘 것이 아니라, 빙글빙글 나선형처럼 비상하는 중이었다.
도피하고 싶었던 무기력의 터널, 나는 그 감정이 패배의 한숨이 아니란 걸 직감했다. 그것은 삶의 경고등이었다. 밤거리를 걸으며, 나만의 호흡을 되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정한 ‘나’는 결국 도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빌딩 숲 속에서도 새가 날고, 편의점 불빛 속에서도 체온은 있으며, 하수관을 흐르는 물처럼 사람들의 감정도 흘러 서로를 이어주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연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버려지는 사소한 것들, 커피 한 모금에 담긴 존재의 농도, 서울역의 사람들 속에 흐르는 순환의 맥박. 이 도시의 일상은 무미건조하게 보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살아 있음의 변주가 숨어 있었다. 삶은 거창한 의미로만 유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편의점에서 먹었던 컵라면의 온기가 삶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빌딩 숲 위로 종이비행기가 날아간다. 희망을 상징하는 그 비행기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도 하늘을 향한다. 그것은 완벽한 날갯짓이 아니라, 흔들리고 접힌 날개로 버티는 비행이다.
삶도 그렇다. 완벽한 비행이 아니라, 추락과 비상 사이를 오가는 끈질긴 시도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희망을 지속하는 일’이다. 거창한 이상을 품지 않아도 좋다. 커피 한 잔을 음미하고, 퇴근길 정체 속에서도 노을을 바라보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하루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동적 자살자들의 도시는 더 이상 죽음의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이며, 여전히 희망을 찾아내려는 자들의 도시이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계속 숨을 쉬고, 걷고, 연결된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이렇게 귀결된다. ‘살아 있음은, 가능성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라도, 그 안엔 여전히 빛이 숨어 있다. 그 빛은 언제나 희미하지만, 어둠이 짙을수록 더 멀리 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도시의 한복판에서, 나만의 노란 비행기를 날린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늘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