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시 돌아 온 미국, 여름
‘글을 쓸 거야.’
미국 다시 가면 뭐 할 거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실은 그가 보고 싶었다. ‘미국에 남겨 둔 사람이 보고 싶어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다음으로는 답답해서. 현실에 갇힌 서울은 넓은 미국 시골 땅과 비교하면 한없이 답답했다. 사실 참을만 했다. 떠날만 한 대단한 이유나 계기는 딱히 없었다. 그저, 도로 가고 싶은 내 마음이 꿈틀댔을 뿐. 사람은 놀기 좋아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은 표면적인 ‘핑계’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내가 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일이었다. 3일 만에 모든 여정이 진행되었다. 비행기 표를 끊고, 돈을 내고, 짐을 싸고, 지구 반 바퀴를 도는 일이 이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던가. 그런 세상이 됐다. 이 사실을 들은 가까운 친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너 부자구나.’ 턱 없는 소리. 모아둔 돈은 이미 6개월 간 교환학생을 하며, 그 다음에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남김 없이 다 털어버렸고, 부모님께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며 생활비를 꿨다. 스무 살 이후로 용돈도 잘 받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한 공식적인 ‘꿈’ 이었다. 다음에는 온갖 종류의 통장에 있는 잔액을 모두 모아 비행기 값을 마련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지, 그렇게 한 두 푼이 모이니 140만원이 채워졌고, 트럼프의 강력한 정책 덕에 혼란스러운 미국의 비행기 표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가격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려 왕복 비행기 140만원. 편도로 아프리카를 경유해 140만원을 냈던 1월의 가격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미국 생활이 막을 올렸다. 여름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가 적도와 더 가까운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 미국의 남부는 그렇게도 뜨거웠다.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에 발을 들인 건 2025년 1월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쯤, 교환학생을 오면서 였다. 미국의 학기는 9월에 첫 학기, 그리고 1월에 학기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그 핑계로 학교를 2년 동안 휴학하며 쉼과 일의 시간을 보냈다. 첫 째는 돈을 모아야 했고, 둘 째는 영어 자격증이 필요했으며, 셋 째는 복학하면 4학년인 내게 기회가 없었다. (학교 정책 상 마지막 학기인 4학년 2학기에는 교환학생 지원이 불가능했다. 당시 나는 이미 3학년을 다 마친 시점이었다.) 그렇게 온 미국은 처음엔 설렘, 그 다음엔 혼돈의 카오스, 지옥을 지나 결국에는 평화를 찾았다. 제발 빨리 시간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1월의 기도는 너무나 충실하게 이뤄져 떠날 때 즈음에는 그런 기도를 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 사이 미국인 남자친구가 생긴 나는 그와 한 달 간 여행을 마친 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마지막 날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기 싫어 버스 창을 사이에 두고 엉엉 울었다. 아니, 꺼억꺼억 울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나는 친언니를 보러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버스를 타고 토론토로 향했고, 그는 다시 무지개 다리(미국에서 캐나다로 국경을 넘는 다리의 이름이 실제로 그랬다.)를 건너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 때 버스 창 밖으로는 세상 아름다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여행 내내 노을을 보고 싶다고 찡찡댔지만 한 번도 제대로 같이 보지 못한 노을을 이제서야 혼자 보게 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보름을 나는 한국에서, 그는 미국에서 지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영상 통화를 하며 일상을 공유했고, 내가 ‘굿 모닝’ 할 때 그는 내게 ‘굿 나잇’ 을 외쳤다. 그러다 2주 만에 도로 같은 시간대로 내가 돌아온 것이다.
빠른 결정이었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 결정을 도와준 데에는 과거의 경험이 한 몫 했다. 정확히 딱 2년 전, 제주도에서 두 달 살기를 한 경험이 있었다. 내 휴학의 시작점이었는데, 당시 모종의 이유로 소위 말하는 ‘번 아웃’이 왔던 나는 버킷 리스트였던 제주살이를 결심했다. 그곳에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삶이 펼쳐졌다. 아침에 일어나 오름을 올라 일출을 본다.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신 뒤 통창으로 난 거실 소파에 앉아 드넓은 마당을 보며 멍을 때린다. 강아지가 뛰놀고 새가 지저귄다. 친구들과 바닷가에 가 마앍은 바닷물에 온 몸을 던진다. 그리고는 그대로 햇빛에 몸을 뉘어 젖은 몸을 말린다.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각자 일터로 향한다. 누구는 카페로 누구는 식당으로, 나는 게스트 하우스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핑도 해봤다. 평생 만나보지 못할 짧지만 좋은 인연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마치 한 편의 청춘 영화같은 삶이었다.
그만큼 좋았기에, 꾹 눌러앉고 싶을만큼 좋았기에, 애초 계획이었던 한 달보다 한 달 더 긴 두 달 동안 머물고 나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서핑을 하다 발목을 심하게 다쳐 한 달동안은 거의 집에서 옴짝달짝을 못해서 더더욱 그랬다. 어쩜 딱 시기도 비슷했다. 봄 동안 그곳에 있었고, 6월에 다시 올라왔다. 제주에 있는 친구들은 여름이 제주의 진짜라며 다시 내려오라고 나를 꼬드겼고, 심지어 비행기표도 내준다는, 집도 제공해준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생각해본다는 말만 수십 번 반복하다 결국 결정을 못해 서울에 남았다. 늘 ‘돈이 없어서’ 라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돈보다는 용기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정해지지 않은 환경에 대한 불안, 그걸 겪어 낼 용기가 없었다. 결국 여름 내내 5평 남짓한 옥탑 방에서 깨작깨작 아르바이트만 하며 20대 초반의 그 눈부신 계절을 보냈다. 몇 번이고 후회하고 비행기표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다시 갈 걸, 다시 갈 걸, 하며 그럼에도 그 생각을 한 시점이 매번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그 시기가 지나면 그 때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또 이젠 정말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후회로 뒤덮인 채 시간은 흘렀고, 2년이 지났다. 가끔 아쉬움과 후회가 문득 튀어 오를 때면 ‘거길 갔으면 이걸 못했을 거야.’ 하며 합리화하곤 했지만, 그건 정말 ‘합리화’일 뿐이었다. 후회로 물든 가슴이 저려오는 것은 그깟 합리화가 채 막지 못했다.
그리고 2년 후, 지금이었다. ‘나 미국 내려가서 좀 더 있다가 올까?’ 하고 묻는 내 모습에 그 때의 내가 투영됐다.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후회하더라도, 잘못된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때와는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본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용기가 필요한 쪽, 귀찮은 쪽, 움직여야 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었따. 그리고 그 때와 다른 결정을 한 지금, 나는 기어이 미국에 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돈으로 거길(다른 나라) 갔으면 어땠을까.’
‘이번 방학에 제주도를 다시 가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금방 소멸되는 잠깐의 감정이었다. 이곳에선 쉬이 먹을 수 없는 한식이 먹고 싶을 때, 함께 지내는 미국인 남자친구와 다툼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올라오는 간지러움 같은 것과 비슷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해보지 않은 만큼의 후회는 아니다. 만약 내가 그 때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또 다시 두려움 보다는 익숙함에 안주했다면 비슷한 흐름으로 비슷한 삶을 지내고 있을 터였다. 우리네 인생이 재미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제와 다른 오늘, 똑같은 나로 평생을 살아감에도 질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지난 날을 오답노트 삼아 새로운 선택을 하고,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끼는 이런 사소한 지점에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내가 용기를 내어 ‘하지 않는 것’ 보다 ‘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가끔 기특하다고 말해준다. 무서웠을 텐데 참 잘했다고. 조금씩 나아가려 노력하는 스스로를 보며, 성장하는 나에 대해 아주 조금씩이지만 알아가며 나와 조금 더 친해진다. 친해지며 더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