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아빠가 늙을 줄 몰랐다.

#1 다시 돌아온 미국, 여름

by Zepline

2년 전, 제주에서 두 달 살기를 하고 서울에 다시 온 적이 있었다. 다음은 당시 쓴 글의 전문이다.


'나 제주에 내려가서 글이나 쓸까? 한 6개월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사실 실행에 옮길지도 몰랐다. 당일 오후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여기서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만 지속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들어설 땐 꽤나 커 보이던 교실이 너무나 답답했고 숨이 막혔다. 마침 해당 수업 시간 학생들이 없어 잠시 쉬고 있는데, 그 40분이 40시간처럼 느껴졌다. 창문 밖은 또 다른 건물의 회색 벽이요, 벽에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계와 책상 6개. 그리고 날 위한 화이트보드 하나. 탈출하고 싶었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아, 적어도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모든 날이 행복할 수는 없지만, 인생은 결과보다 과정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이건 내가 원하는 스물넷의 모습이 아님을 느꼈다.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강한 느낌이 왔고, 그때 떠올린 것이 제주살이다. 최근 제주를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며 다녀왔는데, 그간의 느낌이 너무 좋았고, 내겐 서울보다 제주가 더 잘 맞았다. 참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그날 집에 와 오랜만에 엄마와 치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중에 아빠도 퇴근 후 같이 자리에 앉았는데,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충동적으로 생각만 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이 말을 치킨 첫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부터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를 먹고 날개를 먹고 가슴살을 먹는 동안 조금씩 망설여졌다. '지금 하는 알바는 어쩌고...''거기 가면 어디서 먹고살려고..' 등의 반응을 예상했고, 그 말에 자신 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래, 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랐다. 오히려 아빠는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언제 갈 건지, 어디 있을 건지 본격적으로 알아보고 계획을 세우라고. 넌 할 수 있을 거라며 힘을 실어줬다. 막상 너무 쉽게 동의를 하고 응원을 해주니, 조금 얼떨떨하며 한 발 물러서게 됐다. '나 진짜 가?'라고 물으니, '한 번 결정했으면, 마음먹었으면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그냥 해. 시간 금방 간다.' 머릿속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치킨을 먹고 있는데, 아빠가 갑자기 내 휴대폰을 가져가서 카메라를 켜더니 본인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울처럼 휴대폰 화면을 보며 환하게 웃어보더니 '많이 늙었네.......' 하며 휴대폰 화면을 끄고 다시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술에 살짝 취해 빨갛게 오른 얼굴에는 어릴 때 봤던 아빠의 얼굴보다 주름살이 많이 파여있었다. 아빠가 다시 맥주가 담긴 컵을 손에 쥐며 말했다.


'아빤 내가 이렇게 늙을 줄 몰랐다. 근데 많이 늙었네. 너도 늙어.'


그 말에 한 번 쿵.


'너 때는 20킬로로 가지. 아빠는 50킬로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너무 빨리 가.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른 해. 시간 금방 간다.'


그 말에 또 한 번 쿵.


코 끝이 찡해지며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얼른 달랬다. 아빠는 그리고선 엄마랑 벌써 2년 후 제주에 내려가 살 계획을 세웠다. 내가 먼저 내려가 자리를 잡으면 엄마는 제주에 내려가 부동산 차리고, 아빠는 그 옆에 전기사무소 하나 차려서 기술 쓰면서 일하고 언니는 그 근처에 카페 하나 차리고 동생은 제주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그렇게 온 가족 다 같이 제주에 내려가 사는 것. 지금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끼리 그 이야기를 하며 행복한 꿈을 꿨다.


'얘네들 마당에 풀어놓자. 애들 답답할 것 같아.'

'그럼 나는 언니 카페에서 알바해야지.'

'폐가 같은 거 하나 사서 리모델링해서 살면 되겠다.'


온 가족의 꿈이 생겼다. 그리고 1 년 후인 지금, 그 꿈은 아직 꿈으로 남아있다. 동생은 강원도의 한 대학에 입학해 자취를 하는 중이고, 언니는 다음 달이면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엄마는 뜨개질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고, 아빠는 주름살과 뱃살이 아주 조금 더 늘었다. 나는 여전히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며 낮마다 집을 울리는 공사 소리를 피해 카페로 향한다. 1년 전 그날을 생각하며 또 한 번 꿈을 꿔본다. 그 꿈이 현실이 될 그날에 아마도 나는 이 페이지를 다시 열어 그 소회를 기록하리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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