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 선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속마음

by 김범인

요즘 중고마켓에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물품들.

'가방을 선물 받았는데 제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저렴히 판매합니다 - 5000원'

'친구가 정성 들여 떠서 선물해준 파우치인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3000원'

'손뜨개 인형 선물 받았는데 필요하지 않네요. -7000원'

뜨개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경악할 수밖에 없는 게시물이다. '미쳤다. 내 마음이 찢어진다. 차라리 버려라!.' '선물한 사람은 시간과 정성을 얼마나 많이 들였을까. 저런 사람과는 손절!' '연을 끊기 위해 선물한 사람이 저 판매글을 봐야 한다.' 그들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라도 이 게시물을 본 뜨개인들은 제 마음을 판매대에 올려놓은 것처럼 분노하게 된다.


뜨개를 한 초반에는 나도 선물을 곧잘 했었다. 그 당시 만든 것들은 작고 볼품없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조악한 작품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이 곧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 같아서 기뻤다. 나의 손재주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에 우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덤벙대고 활동적인 줄 알았던 나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나도 뜨개에 몰입하다 문득 정신을 차릴 때면 내가 몇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서 손과 눈동자만 놀렸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나는 열심히 뜨고, 뜨고, 또 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나씩 선물을 하곤 했다. '널 위해 무려 나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했어.'라는 메시지를 담아, 이렇게 형태를 갖게 된 나의 마음을 전달했다.

처음에 가장 많이 했던 선물은 수세미였다.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선물이다. 수세미는 어느 집에서나 필요하고 매일 사용하는 물건이라서 누구에게 선물해도 좋아했다. 손뜨개 수세미의 화려한 색상이나 기발한 디자인들은 뜨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미소 짓게 만들 만큼 재치 있고 아름다웠다. 한 시간 정도 집중해서 뜨개를 하게 되면 수세미 하나가 완성된다. 한가닥의 실에 나의 시간과 마음을 담으면 예술적인 생필품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한가. 그 예술적 생필품은 지인의 주방에 자리 잡고 사용할 때마다 내 마음을 확인시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뜨고, 뜨고, 또 뜨다 보니 나의 뜨개 실력도 향상되었다. 선물은 파우치, 넥워머, 간단한 의류도 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손뜨개의 특성상 시간이 꽤 많이 걸렸을지라도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나의 애씀과 그에 비례하는 마음의 정도를 헤아려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사람들은 나의 선물에 대해 기대를 하고 평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수세미 한 장을 선물하면 '겨우?'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분명히 나는 예전과 똑같이 시간과 마음을 쏟았는데 마트에서 사다 준 수세미 대하듯 하는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내가 어느 정도의 뜨개 실력을 갖게 되었으니 수세미는 쉽게 대충 만든 뜨개 소품이라 생각하는 걸까? 내게 차고 넘치는 물건이라 주는 거라 생각하는 걸까? 의아했다. 때로는 뜨개 작품에 다른 것을 포함해서 선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파우치를 떠서 그 안에 립스틱을 넣어 선물하거나, 문구류를 넣어 선물했다. 그랬더니 파우치보다 립스틱이나 문구류에 더 집중되는 관심에 서운했다. 가끔은 자신의 기준에 잘 맞지 않다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경우, 나는 그들이 선물을 받고서도 기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반응. '이것 봐봐, 내가 어떻게 떠야 더 실용적 일지 알려줄게.' 또는 '나는 이런 것 말고 저런 게 받고 싶더라.' 또는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선물해 줄 수 있는 것 아니야?'.


나는 선물을 받는 사람의 취향과 필요를 고려해서 실을 고르고 디자인을 고르고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기성품과 달라서 사이즈나 모양과 같은 규격을 정밀하게 맞출 수가 없었고 내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손뜨개 소품이나 의류는 워낙에 취향을 많이 타는 물건이라서 상대방이 대만족 하는 경우가 쉽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아마도 상대방은 '아 내 취향이 아닌데 이걸 어떻게 사용하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색이다.' '내가 사용하지 않을 물건이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사용하지 않을 물건을 집에 그냥 두느니 중고거래 사이트에 판매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까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좋아해 주길 강요하는 듯한 태도나 선물 자체를 넘어선 마음을 봐달라는 지나친 요구는 잘못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선물을 무조건 기뻐해 줄 거란 내 기대가 무리한 걸까, 내 마음을 봐주지 않는 상대방이 너무한 걸까.


나는 이제 뜨개 선물을 거의 하지 않는다. 왠지 상대방이 나의 마음의 값을 저울질하고 있을 것 같았고 나도 역시 상대방의 마음을 재고 있었다. 가격이 매겨진 물건을 구입해서 선물하는 경우는 그 값어치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나의 뜨개 선물의 가격은 정확하게 따져볼 수 없으니까. 같은 선물을 받고도 누군가는 '만 원짜리'라고도, 누군가는 '백만 원짜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상대방이 '만 원짜리'의 하찮은 선물을 받은 듯 시큰둥하구나, 이 사람은 '백만 원짜리' 고급 선물을 받은 듯 좋아해 주는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이렇게까지 감정 소모를 해야 할까 고민되는 순간이 왔고 나는 뜨개 선물보다는 차라리 치킨이나 피자 선물이 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동안 경험한 유쾌하지 않던 감정의 교류들을 통해 뜨개 선물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경험을 하고도 나는 내 곁의 누군가에게는 뜨개 선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게 무슨 앞뒤 안 맞는 말이냐고 발끈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 누군가에게는 내 마음이 담긴 뜨개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경험을 통해 상처를 받고 나니 그런 이유로 인해 나의 마음을 전달할 때 가장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것은 뜨개 선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게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 역시 뜨개 작품의 가치를 떠나 나의 마음을 보아줄 것 같다. 사실 그 작품의 가치가 만 원짜리인지 백만 원짜리인지가 뭣이 중하겠는가. 내가 선물한 소소한 뜨개 액세서리나 소품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용하는 친구를 볼 때나, 내가 떠준 가방을 자주 메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그걸 뜨는 동안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며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알아준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친구들의 나를 향한 마음을 짐작할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이렇게나마 서로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마음이더라도 선물을 받을 사람은 취향이 다를 수 있으므로 선물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뜨개 선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봐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서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표현방식이 다정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본인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나의 마음을 중고 거래하듯이 뜨개 선물을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리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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