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미소

발급번호-017

by stamping ink

몇 해전 감당하기 힘든 무례한 사람을 만난 적 있다.

그와의 시간은 나에겐 고통이었다. 급한 성격에 분노는 필요할 때만 조절했다. 우선 만만한 상대에게는 서슴없이 독설을 내뱉었고 본인보다 위라고 생각되는 이 앞에서는 한없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윗선에서 곤란해할 때마다 해결사처럼 일을 받아 자신보다 아래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물론 마무리 보고와 수고의 인정은 그의 몫이었다.

한 동안 나를 괴롭히던 무례한 이에 대응하는 나의 현명한 방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어보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나 자신부터 챙기자였다.

생계나 혈연으로 묶인 대상이 아니기에 거리를 두니 마음이 편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한 두해 그와의 교류가 없어졌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어? 오랜만이다. 내가 너 얼마나 챙겼는데 연락도 안 하냐? 얼굴 좋아졌네? 웃는 게 참 좋아 보인다."

그를 향해 웃는 썩은 미소조차 그는 자신이 편한 대로 반가운 미소로 보였나 보다.


무례한 사람에게 나의 대응 방법은 '썩은 미소'다.

오래전 만화 세일러문에서 여주인공이 변신을 하며 외치는 말,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응징으로 스스로 깨닫게 하는 정의의 사도도 있을 테고, 그것마저 재치 있게 해결하고 넘기는 고수도 있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면 '참을 인(忍)' 대신 사용할 무기가 많아진다.


"어? 저분 또 오네요."

낯선 이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보고는 사회복무요원이 짧은 브리핑을 했다.

"어제 연가라서 자리 비우셨을 때, 저분이 오셔서 모두 고생했어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의 악행을 주변에서 토해냈다.

그가 들어오고 사무실 안은 정적이 흘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어제 옆자리 직원에게 걸어가던 그에게 유도탄을 던졌더니 발길을 돌려 내게 왔다.

다행이란 표정의 옆자리 직원은 고맙다는 눈빛이 전해졌다.


"어제 서류를 하나 떼었는데 말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을까요?"

사람이 하는 일이라 혹시 모를 실수는 발생하지 않으란 보장이 없다. 재방문한 민원인에게 불편을 드릴 수 있던 상황인 듯싶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아. 서류는 제대로 됐는데 내가 바쁜데 집에 인터넷이 안 돼서요."

그는 능숙하게 자신이 들고 온 노트북을 켜며 당당히 이야기를 했다.

"여기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요?"

그에게 느껴지는 아우라가 심상치 않더니 역시 강한 무례의 결계를 걸치고 나타난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여긴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즘 와이파이가 안 되는 곳이 있다고요? 참나. 그럼 내 메일로 이 서류를 스캔해 온 것을 여기로 좀 보내줘요."

와.. 이 끝을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란...

"민원인 분께 죄송하지만 저희는 보안상 포털에서 개인 메일을 열 수 없답니다. 인근 pc방이나 다른 방법을 이용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여기서 물러서면 모두를 떨게 만든 그가 아니다.

그는 서류를 불쑥 내밀었다.

"메일로 여기에 좀 보내줘요."

3 타석 홈런... 처리가 되는 일인지 아닌지 따윈 상관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해결하면 될 사람이었다.

내 휴대폰을 들고 가 그의 노트북에 핫스폿으로 인터넷을 연결해 주었다.

"저희 메일은 악성코드에 취약해서 문제가 발생하면 처리가 복잡하니 제 개인 핸드폰 와이파이를 열어드릴게요. 이걸로 연결해서 보내보세요."

그의 노트북의 인터넷 연결 상태를 나의 폰으로 연결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해내고 나서야 짐을 챙겼다.

"여기 와이파이 좀 달라고 건의해요."

이 시물레이션은 이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나를 위해 한다는 말인 것이다.

"괜찮습니다. 업무 보는 사무실에서 개인적인 일을 할 일은 없으니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다음번에 이런 일이 있으시면 다분히 개인적인 일이시니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트북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느라 내가 하는 말 따위는 듣지 않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끝판왕인 그는 나에게 말했다.

"웃으며 도와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이 나온 것만 해도 내가 큰일을 한 것인지 직원들은 '우와'하는 입모양을 내었다.

님아, 님아... 이건 썩은 미소라고... 듣고 싶은 대로 듣지 말고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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