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섶(1/6)

[쉼 소설]

by stamping ink

며칠째 밤과 낮이 섞인다. 계속되는 열대야는 낮에 뿜어대던 열기를 꺼트리지 못한 불씨처럼 괴롭혀댄다. 거실 창밖에 보이는 그늘진 바닥엔 도둑비가 작은 웅덩이 자국을 남겼지만 무심한 태양은 그마저 남김없이 지우고 있다. 가로수에 붙어있는 매미는 고층 아파트 위에서도 더위를 알리려 쉬지 않고 몸을 떨어 메마른 아파트 사이에 소리를 메운다.


민은 풍경화 보듯 창밖을 껄떡하니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떠난 가족들이 잘 먹었다는 말 대신 남긴 음식과 그릇들이 흩어져있었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개수대에 담아 씻어 내렸다. 그릇을 닦아 내고 미뤄뒀던 커다란 냉장고의 냉동실까지 세정제 묻혀 닦아 냈다. 구석구석 기름때를 지우다 보니 렌즈 후드에 말라붙은 누런 기름 자국까지 눈에 거슬렸다. 그마저도 뜯어내 불려 씻어냈다. 주방에 모든 것들이 민의 손을 거쳐 그녀의 성격처럼 매고르게 줄을 서 차례대로 반짝였다.

풋잠 탓에 아침내 아파오던 머리가 청소에 집중하며 조금은 맑아지려 할 때, 며칠 내내 나를 휘주근하게 만든 우편으로 온 뻣뻣한 종이가 눈에 자꾸 밟혔다. 커피라도 마셔야 마음이 잔잔해질 것만 같았다. 평소처럼 커피 잔을 꺼내다가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이 제일 아래 서랍을 당겼다. 서랍 구석엔 몇 년 전 이태리 여행에서 사온 작은 모카포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이드가 이 나라를 대표하는 물건이라는 말에 사용법도 모른 채 단체 여행객들이 하나씩 집어온 물건이었다. 은색 작은 주전자처럼 생긴 포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 바라봤다. 그땐 하나라도 잊지 않고 싶은 소중한 기억이었는데 이젠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조차 아령칙했다.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사용법을 검색해 봤다. ‘모카포트’라 포털에 검색하자마자 커피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화면에 넘쳐흘렀다. 제일 간결하게 적혀 있는 내용을 훑어보며 얼마 전 선물 받은 원두가루가 생각났다. 고급스러운 포장을 뜯기 아까워서 주방 선반에 전시품처럼 자리 잡은 커피 봉지를 꺼내 들었다. 잠시 망설여졌지만 처음 봉지를 풀며 스며 나오는 진한 커피 향은 금세 코를 즐겁게 해주었다. 작은 티스푼을 들어 커피를 담으려다 모카포트 안에 커피 자국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여행 후 두어 번쯤 원두의 본디 맛을 줄밑 찾아보려다 결국 귀찮음에 원두가루를 사용하기 쉬운 커피머신에게 내어주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은색 포트를 분리해 물을 담고 원두 가루를 아슬아슬하게 담아 본다. 포트를 다시 끼워 맞추고 불이 제일 작게 올라오는 가스버너 위에 조심스레 불을 댕겼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작은 포트에 연기가 내어 나오더니 진한 커피향이 흘러나왔다. 잠시 향에 취한 사이, 주둥이에서 가차 없이 커피가 뿜어져 나왔다. 황급히 불을 끄고 포트의 손잡이를 잡으니 뜨거워진 포트는 제멋대로 사용한 것에 용납하지 않듯 그녀의 손에 화를 전했다. 쏟아져 버린 커피가 다시 찬찬히 읽어보려 들고 온 뻣뻣한 종이부터 싱크대 위까지 물들였다. 젖은 행주로 닦아 내다 민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지저분해진 커피 자국을 행주로 지워내며 흠뻑 젖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민은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닦았다. 건강검진을 받은 병원에서 재검 후 받아온 종이 위에 적힌 글씨도 사라지길 바라듯 박박 밀어댔다. 악성이기는 하지만 초기에 발견되어 다행이라 했다. 충분히 고칠 수 있다고 민을 안심시켰지만 암이라는 단어가 너무 두려워 남편에게 위로받을 마음에 갑상선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게 누구보다도 더 냉정하게 말을 했다.

‘갑상선암은 다 낫는 병이라던데. 게다가 초기면 약물치료로도 되는 거 아니야? 당신 아니어도 머리가 복잡해 죽겠어. 아무래도 힘든데 그런 것쯤은 혼자 해결할 수 있잖아.’

저녁에 울려대는 전화기 너머 시어머니는 한술 더 떠 민을 몰아쳤다.

‘넌 집에서 살림만 하는 애가 자기 관리도 못하고 남편도 제대로 못 챙기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니? 내 주변에 말기 암 걸렸던 친구 말을 들으면 갑상선암은 감기라 하더라. 그나저나 니 남편은 요즘 왜 그리 말랐다니? 너 아프답시고 제대로 살림도 안 하고 그러는 건 아니냐?’


원치 않은 되새김이 마음에 맴돌아 상처가 다시 벌어지려 할 때쯤, 커피 향에 이끌려 건강검진 종이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카포트 안에는 작은 양의 에스프레소가 남겨져 농축된 진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커피양의 몇 배가 되는 차가운 얼음물을 섞어 식탁 위로 자리를 옮겼다. 얼음과 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를 들으며 민은 눈부신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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