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은이 <제3한강교>, 전파사 TV앞에서

강물은 흘러갑니다

by 황준선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


장소 — 그때 거기

전파사라는 가게가 있었다.

라디오를 고치고, 텔레비전을 고치고, 선풍기를 고치던 동네 수리점.

지금은 사실상 사라진 업종이다.


이 전파사 앞에 TV가 한 대 놓여 있었다.

수리를 마친 TV를 시험 삼아 틀어놓는 것인데,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집에 TV가 없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여름에는 마당에 평상을 놓고,

겨울에는 유리문 너머로 들여다봤다.

토요일 밤 쇼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그 앞은 작은 극장이 됐다고 한다.


리모컨도, 채널 선택권도 없었다.

전파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채널을 다 같이 봤다.


모르는 사람과 같은 화면을 보면서,

같은 데서 웃고,

같은 데서 박수를 쳤다.


그녀 — 1979년의 열다섯

대전 시내 중학교에 다니던 그녀는,

토요일 저녁이면 골목 끝 전파사 앞으로 갔다.


아버지는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어머니는 부엌에 있었다.


TV는 부잣집에나 있는 거였다.

전파사 아저씨가 호의로 틀어놓은 TV 앞,

동네 아이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날 밤 쇼 프로그램에 혜은이가 나왔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열다섯의 그녀에게 그건 다른 세상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 한강이라는 강, 한강교라는 다리.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의 이름이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스피커에서 이 가사가 나왔을 때,

전파사 앞이 조용해졌다.


가사 한 줄 — 그때 이렇게 들렸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열다섯의 그녀에게 이 가사는 낭만이었다.

한강이 뭔지도 잘 몰랐다.


대전에는 갑천이 있었지만,

한강은 더 크고 더 멀고 더 서울 같은 강이었다.


다리 위를 걸으면 바람이 불겠지.

물이 반짝이겠지.


말이 없는 강을 바라보는 다리 위에서,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같은 가사, 다른 귀

그녀가 서울에 올라온 건 스무 살 때였다.

대학을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한남대교를 수없이 건넜다.

출퇴근길에, 택시 안에서, 아이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


예순한 살의 그녀에게 이 가사는 다르게 들린다.

진짜로 한강은 흘러만 간다.

삼십 년 넘게 이 도시에서 살았는데, 강은 한 번도 쉬지 않고 흘렀다.


아가씨, 저기요, 누구의 엄마, 할머니...

나를 부르는 이름도 바뀌어가며

그렇게 나도 계속 흘러가고 있다.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 제3한강교처럼.


열다섯에는 한강을 몰라서 설렜고,

예순한 살에는 한강을 너무 잘 알아서 아무 느낌이 없다.


그런데 이 노래를 다시 틀었을 때, 떠오른 건 한강이 아니었다.

전파사 앞이었다.


여름밤, 동네 아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도시를 상상하던

그 열다섯 살의 저녁이.




제3한강교는 1985년에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강은 그대로인데, 다리 이름이 바뀐 것이다.

혜은이가 노래한 그 다리와 지금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그 다리가 같은 다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꽤 많을 듯하다.


이 노래의 원곡 가사에는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 둘은 하나가 되었답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당국이 개사를 명령했다.

2006년 혜은이 본인이 리메이크하며 원곡 가사를 복원하면서, 개사 강요의 억울함을 풀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