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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품이오] 정직한 생명의 흔적 붉은 하몽의 짬쪼름함

생명의흔적붉은하몽색

by 컬러코드


밀라노 여행 중, 브레라 지구의 작은 델리숍에서 처음 만난 하몽.

얇게 썬 햄 한 장이 투명한 종이처럼 접시에 놓이던 그 순간, 나는 음식이 색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붉고도 맑은 빛, 살짝 말려 투명함을 품은 듯한 가장자리, 그리고 햇살이 비추는 유리 진열장에서 그 색은 더욱 고요하고도 풍요로워 보였다. 마치 시간이 농축된 듯한 고운 붉은빛이었다.


하몽(Jamón)은 스페인의 전통 생햄으로, 돼지 뒷다리를 천천히 말려 만든 발효 식품이다.

특히 ‘하몽 이베리코(Jamón Ibérico)’는 이베리아 반도의 도토리를 먹고 자란 흑돼지에서만 얻을 수 있어 더욱 귀한 대접을 받는다. 색 또한 특별하다. 살코기의 진한 루비빛과 지방의 미묘한 상아색, 그리고 건조 과정에서 스며든 햇빛과 바람의 시간이 어우러져, 단순한 고기 이상의 ‘색의 풍경’을 보여준다.


하몽의 색은 그 제작 과정과도 깊이 연관된다.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후 최소 12개월 이상 공기 중에 건조하는 전통 방식은, 색을 더욱 진하게 숙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단백질이 분해되고,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며, 고기는 붉은색에서 갈색을 띠는 스펙트럼 위를 천천히 여행한다. 그 사이 미세한 균열처럼 흰 결정이 박히는 지방의 질감은, 숙성의 시간만이 남길 수 있는 정직한 흔적이다.



하몽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기록된 이 햄은, 중세 유럽의 식탁을 지나 현대의 고급 요리 문화 속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몽은 생존의 음식에서 미식의 음식으로, 일상의 고기가 예술로 진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햄이 붉은색이 된 것은 시간과 정성이 빚은 생명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음식에서 색을 보지 못한다. 단지 맛과 향에 집중하기에. 하지만 하몽은 그 색으로 말을 건다.

마치 오래된 벽화처럼 붉게 그어진 시간의 흔적, 햇살과 바람이 빚은 천천한 아름다움.


그 속에서 나는 밀라노 여행의 기억을,

브레라 거리의 햇살을, 그리고 하몽을 처음 맛보던 그 고요한 오후를 떠올린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하몽 한 장의 색은, 그저 고기가 아니다.

햇빛과 역사, 기다림과 정성이 만든 투명한 붉은 시간이다.




이제 우리는 하몽을 마트에서도, 비행기 기내식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처럼 어디서든 쉽게 즐길 수 있는 이 시대의 편리함은 과거 수년을 기다려야만 맛볼 수 있던 음식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감사함을 더 깊이 일깨워줍니다.


하몽의 색은 인내, 전통, 기후, 시간, 그리고 인간의 지혜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맛의 색’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러한 정성 어린 맛을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네 마음은 무슨 색인가요?




*이미지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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