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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낮잠 Dec 06. 2017

단상

그리고 잔상

어제

동생이 놀러 왔다. 골뱅이 무침 양념을 싸들고, 귤과 양파와 맥주 그리고 도넛 가게에 들러 나를 주려고 산 쫄깃한 도넛을 사 가지고.


어제는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한 밤이었다. 음식을 가득 차려 먹고 후식으로 도넛과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흐르는 캐롤은 마음을 설레게 했고 나는 바닥에 누워 단편집의 마지막 편을 읽었다. 나는 가장 넓은 마음으로 대해주어야 할 동생에게 내 집에서의 룰들을 읊어가며 깐깐하게 굴었고(예를 들면 머리가 젖은 채로 침대에 눕지 마세요 같은 것), 크리스마스 불빛 장식은 건전지로 키는 거라 닳을지도 몰라 아주 잠깐 보여주기만 했다. 하지만 그 시간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하고 얼굴 한번 서로 마주치지 않은 채 틱틱 거리면서도 따듯함을 느꼈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고 우리는 말하고 웃었다.


동생은 격렬한 전투를 최선을 다해 치렀고, 며칠 뒤 나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불안함 때문인지 그날도 혹시 내게 같이 있어주면 안 되느냐 물었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다음날 아침, 자고 있는 동생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집을 나왔다. 착시인지 하얗게 바래버린 눈이 여기저기에 살짝 얹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캐러멜 마끼아또 쿠폰과 함께 버튼 하나만 누르면 계좌로 돈이 입금되는 기능을 이용해 적지만 용돈을 보냈다.


오후에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웹 사이트에 들어가 정보를 찾아 읽었는데 아기장수 설화를 빌어 죽음과 재탄생의 변이와 확장을 이야기한다는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라는 문장에 한참 동안 시선이 멈췄다. 겨드랑이에서 작은 날개가 나오는 우투리를 얘기하는 걸까, 아기장수 우투리를 잠깐 생각했다. 예전에 연남동에 사는 백현진 씨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그런데 올해의 작가라니, 너무 멋지다. 퇴근 후 빨리 달려가야겠다.


작은 봉투의 끝을 잘라내어 진한 갈색 가루를 종이컵에 털어 넣고, 온수를 부었다. 은색 비닐봉지를 찢어내고 노오란 가루를 유리컵에 붓고, 온수를 넣어 저어봤지만 온수의 온도가 충분하지 않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55초를 돌렸다. 따듯한 수프가 완성이 되었고 숟가락으로 쇳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게 호호 불어 떠먹었다. 너무 달다 싶으면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셨다. 귤도 하나 까먹었고 물도 떠다가 가습기도 틀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도 골랐다. 해야 할 것들은 많은데 내년 업무계획도 제출해야 하고 하반기 업적도 스스로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단상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One And The Same이 흘렀다. 어제도 말했고 생각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건 정말이지 귀찮은 일. 중요한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이미 신경을 쓰고 있는 자신이 미워질 때마다 왜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했을까 생각한다. 오늘도 찬란한 순간들은 너무 짧아서 슬프고, 그 짧음에 슬퍼하다 세월이 무던하게 지나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표정은 슬퍼 보인다기보다 씩씩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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