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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낮잠 Feb 20. 2017

동물원은 폐쇄되었습니다.

6 and 2 but 9

우리는 폐쇄된 동물원 옆 미술관을 갔다.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라는 문장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따듯하고 먼지 같은 문장들이 적힌 빛바랜 종이들과, 그 위에 떠있던 달 같은 조명들과, 내가 좋아하는 말(馬)과, 벽에 머릴 처박고 있던 그 말들과, 아스러질 것 같은 단어들, '님'이라는 핑크색 네온사인과, 허무주의가 깔린 공허한 작품들과, 그곳에 실재하는 우리가 있었다. 우리는 거꾸로 6 관부터 돌아 내려오면서 관람을 하고, 배가 고파져 갈릭치킨 리조또와 딸기 스무디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고 기대 이상의 맛과 분위기 그리고 낮은 데시벨에 기분이 좋아졌으며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계단에서 갈비뼈에 손을 얹고 흉곽 호흡을 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나의 심장은 따듯했다.


    나는 소라게나 달팽이와 같이 내가 짊어질 수 있는 정도의 짐만 가지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조금만 방심하면 짐은 늘어나 버려서 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작업을 간헐적으로 해야만 하는데 이 작업은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곧 정든 집을 떠나 이사를 가야 하는 나는 오래된 상장들과, 모아둔 서류들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물건들과, 보풀이 난 옷들을 모조리 내 집 밖으로 꺼내 버렸고 가볍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정성스럽게 코딩을 해주었던 나의 어린 시절 상장들과 나의 그림들을 버릴 때는 눈물이 날 뻔도 했지만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마치 새로 태어난, 새로운 시작. 어디론가 새로운 곳을 향해 옮겨간다는 것.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도 소멸을 하려니 또 기쁘다. 당분간은 밝은 사람이 되어서 자꾸 입꼬리에 힘을 주는 내 모습이 굉장히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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