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은 크레파스 향

1장 : 계절보고서

by 양율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어릴 적엔 파란 하늘을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하늘이 으스댈만한 자산은 맑은 공기였겠습니다. 무료로 기부된 공기를 구속 없이 체험하다 보니 행복이었다고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스케치북에 자주 파란 하늘을 그리던 탓에 하늘은 크레파스 향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일들입니다.


막 개발되는 도시에서 자라던 탓에 듬성듬성 발소리 없는 뒷산들이 같은 맑은 하늘 아래 흐뭇하게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 단골 슈퍼가 있었는데, 슈퍼의 이름은 <민우네슈퍼>였습니다. 세탁소도 <미나컴퓨터세탁>이었고요. 음악학원도 <세화피아노교습소>였습니다. 자기네 꼬맹이 이름들로 가게를 여는 마음이 새삼스레 정겹습니다. 동네에서 누구나 얼굴 아는 어린 아들딸들이었습니다.


저는 민우와 자주 어울려 뒷산에서 놀았습니다. 여름이면 계곡 바위를 들어 가재를 잡고요. 가을이면 편을 짜 솔방울 던지기 놀이를 했습니다. 아직 컴퓨터 게임을 모를 나이라 즐길 것이라곤 산을 뛰 내리며 호연지기를 다지는 게 다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노을이 지는지도 모르고 산을 걷고 다녔습니다.


좀 더 커서는 다른 친구와 어울렸습니다. 기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습니다. 둘이 방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읊조렸습니다. 어린아이 둘이서 해내는 섣부른 음악이란 게 어찌나 재밌던지요. 우리는 서슴없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습니다. 사정이 좋고 나쁠 것이 없이 서로의 밥을 나눠 먹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름 방학이면 외할머니집으로 향했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낡은 한옥에서 두 살 터울의 사촌형과 항상 음악을 나눠 들었고 밤엔 고구마를 아궁이에 집어던졌으며 아랫목에서 서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 알게 된 동운 형과는 매일 보는 사이였습니다. 저녁이면 함께 <다이하드> 라거나 <사탄의 인형>과 같은 비디오를 빌려 보았습니다. 눈가리개를 하고 술래잡기를 했고요, 담배 냄새 맡으며 오락실도 전전했습니다. 밤늦게 오락을 하고 있으면 엄마가 우릴 잡으러 와 서러운 심정으로 밤새 물통을 두 팔로 들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방학이 되면 가방을 메고 산 아래 갈대 밭에서, 호숫가 옆에 걸터 앉아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산이 좋고 노래가 좋나 봅니다.


시간이 꽤 지난 모양입니다. 지금은 그 누구와도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습니다. 그러하더라도 아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서 사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서로의 집을 드나드는 것도 어색할 것이고요. 그때처럼 우리의 벅차오르는 생명력을 복구하기 난해합니다. 어른의 성정이 내뱉는 무거운 언어가 소년의 치열한 순수를 망치는 것이 쓸쓸합니다.


파란 하늘이 뜰 때가 적어 아쉽습니다. 어릴 적 그 하늘이 아래로 기부해 준 맑은 공기가 행운이었단 것을 지금에서야 눈치를 챕니다. 가끔 재개발이 멈춘 동네 가게 오래된 간판을 보면 한 참을 바라봅니다.


보석함 하나가 있다면 그건 크레파스 향 나는 유년기의 기억입니다.


모든 소리는 왜곡이 없었구요. 우리가 보는 것이라곤 가녀리고 푸른 여름 햇빛뿐이었습니다.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