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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아래의 땅 단상

2025 DMZ IDFF 2일차. 발 아래의 땅.

by Gozetto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스러져가는 잔불에도 타오르는 약동이 있음을(3.5)


어떤 이유로 늙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무협지 혹은 만화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혹은 어렸을 때 수없이 돌려본 만화 『전략삼국지』(요코야마 미츠테루 作)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TV 사극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역사 혹은 동양 판타지 콘텐츠를 접하는 과정에서 나이 듦 혹은 늙음 등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듯하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늙음에 대해서 가장 중대한 충격을 준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서 나오는 「황혼의 반란」 에피소드이다. 고령화된 인구에 대해서 노인들을 안락사 시키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로 노인들이 정부의 안락사 정책에 저항하나 끝내 저항 운동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노인들의 저항 운동이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저항 운동을 이끈 '프레드'가 자신에게 안락사 주사를 놓으러 온 정부군 CDPD 병사를 붙잡고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라 말하는 결말의 장면은 늙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결국 늙는다. 황동혁 감독의 <수상한 그녀>(2014)에서 늙기 전 자살해 추한 모습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학생이 나온다. 하지만 대학생의 발언 뒤로 칠순 할매 '말순(나문희 분)'가 비춰지는 장면은 결국 우리가 늙는 순간을 좋든 싫든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즉, 늙기 전 죽겠다는 말만큼 의미 없는 말도 없다. 죽음의 선택을 의식적으로 한다는 것은 한 세계의 종말을 의식적으로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신이라 여긴 선택이며 모순되게도 우울한 오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늙은 본인을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게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르사 로카 팬버그 감독의 <발 아래의 땅>은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서 끊어질 듯한 노인들의 삶에서 미약할지라도 여전히 타오르는 약동이 있음을 포착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 혹은 내일 삶이 끝날 것 같은 노인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 죽음의 고통이 육체 곳곳에서 느껴질지라도 젊은 시절의 노래를 부르고, 따사로운 햇볕에 감사하며 옆의 노인과 담배를 태우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키스를 한다. 아주 평범한 일상이나 모든 육체의 움직임이 정적인 것이나 다름없는 노인들의 모습은 그런 평범한 일상조차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오늘 하루를 넘기도록 도와주소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가 아름다워서 감사합니다와 같다. 노인들의 하루는 삶의 여정이 끝나지 않고 여전히 어떤 모습으로든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약동이다.


우리는 늙는다. 이른바 리즈 시절이라고 하는 젊은 시절과 비교하면 '추'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며 괴로워할 정도로 결국 모두 늙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정말 늙음은 추한가? 늙음은 남들이 보기에 추해서 추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가 추하다고 생각해서 추한 것인가? 추하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아닌 것도 아님에도 늙는 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이는 것, 인식되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에 눈앞에 있다는 말은 아직 죽음 자체를 맞이한 것은 아니기에 계속 살아갈 뿐이다. 오늘 삶이 끝나지 않게 해주소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고 있을 뿐임을 당연하면서도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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