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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고였을 뿐 단상

광화문. 씨네큐브. 그저 사고였을 뿐.

by Gozetto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사고라는 이름의 폭력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대립(4.0)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올해 초 관람한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과 함께 현 이란의 현실과 정권에 비판적인 영화이다.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이란 민중 운동 현장을 촬영한 푸티지 영상과 영화의 서사가 교차하면서 영화의 서사가 스크린 바깥으로 현실화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란 민중 운동 현장이 교차하는 순간 아버지 '이만(미사그 자레 분)'는 단편적으로는 가족의 아버지이자 직업이 수사판사인 사람 혹은 정권의 앞잡이로만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정권이 이란 민중을 억압하는 현실 혹은 정권이 민중을 억압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인물이 된다. 푸티지 영상의 민중 운동 현장이 실제 혁명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인물로서 서사에서만 움직이던 이만과 그 가족의 이야기는 단순히 '이야기'로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는 독재 정권의 시스템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성은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게 하면서도 영화 속 이란과 현실의 이란을 교차 인식하게 해 이만의 폭력성에서 현실적인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나아가 어떤 지점에서 본다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다큐멘터리적 요소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단순한 극영화로 느끼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관객이 현실을 보다 명징하게 보게 한다.


반면 <그저 사고였을 뿐>은 분명한 극영화로서 현 이란 사회를 조명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보다 영화를 통해 느껴지는 공포감은 더 원초적으로 다가온다. 늦은 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가족이 들개를 치어 죽이는 도입부는 공포감으로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들개를 칠 수밖에 없었던 아빠 '에그발(에브라힘 아지지 분)'에게 한창 흥겨운 노래에 신나 있던 어린 딸은 아빠가 개를 죽였다며 슬퍼한다. 그런 딸에게 엄마는 아빠의 잘못이 아니라고,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결국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말하며 딸을 달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의 원초적 공포는 엄마의 이 대사에서부터 시작한다. 분명 가족의 차에 들개가 치인 것은 사고라 할 수 있다. 다만 결국 그 사고로 개는 죽었다. 사고로 인해 피해자가 생겼고 법적으로는 아닐지언정 도의적으로는 가해자가 생겼다. 하지만 가해자 측은 말한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기에 본인의 행동은 가해가 아니라 신의 뜻이 행해진 우연, 즉 사고일 뿐이다 라고.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이러한 논리 구조는 인간 본인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최악의 가해이기에 문제가 된다. 무슬림 사회이기에 알라라는 이름의 신으로 대변되었을 뿐이다. 신이라는 이름은 가깝게는 옆나라 중국에서는 공산주의 정부를 위해, 과거 옆나라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나 한국의 독재 정권에서는 국가를 위해, 그리고 최근 극우 세력의 논리에서도 알 수 있듯 대통령 혹은 국가를 위해라는 말로 치환될 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저 사고였을 뿐>은 종교 중심의 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이란 사회를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치환해 '사고'와 같은 말, 현상, 형태 등으로 인식하는 원초적 공포가 짓누르는 사회로 보며 나아가 이러한 원초적 공포를 청각화한다. 에그발이 걸을 때마다 의족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과거 그의 고문으로 없는 죄를 억울하게 실토하며 고통 받은 피해자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 분)'만이 아니라 관객에게까지 섬뜩하게 들린다. 고문 당할 때 에그발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의족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둔탁한 소리는 너무나 선명했기에 바히드의 계단 위에서 에그발의 얼굴은 보지 못해도 그의 의족 소리를 듣는 정비소 장면은 바히드에게는 고문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관객은 불안해하는 바히드를 통해 어두운 밤에 차를 몰고 있어 에그발의 얼굴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의족 소리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바히드의 불안과 공포는 그렇게 관객에게 청각적 인식의 씨앗으로 심어진다. 나아가 에그발이 정말 과거에 정부의 비밀 경찰인지, 즉 에그발의 정체를 알기 위해 모이기 시작해 갑론을박을 벌이는 피해자들과 지인인 '시바(마리암 아프사리 분)', '골리(하디스 하크바텐 분)', '알리(마지드 파나히 분)', '하미드(모함마드 알리 엘야스메흐 분)'의 모습은 정치 블랙코미디답게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에그발의 정체가 비밀 경찰이라고 해도 그를 죽일 수 없으며 에그발이 비밀 경찰이 아닐 때는 에그발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도덕적으로 자책하게 될 평범한 시민인 그들의 모습은 이따금 떠오르는 과거의 공포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평생 몸부림쳐야 하는 피해자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의 마지막 순간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에그발은 바히드와 시바에게 눈이 가려진 채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정신적 고문을 당한다. 그가 비밀 경찰인지 아닌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되는 에그발의 고문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양가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에그발은 자신이 비밀 경찰이고 자신이 바히드와 시바를 비롯한 피해자들을 고문한 가해자가 자신이 맞다고 실토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바히드와 시바의 정신적 고문은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에 의한 사고라는 부당함을 당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이들이 권력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하미드처럼 비밀 경찰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지만 자신의 감에 따라 에그발이 가해자라고 굳게 믿으며 죽이려는 누군가. 바히드처럼 긴가민가 하는 가운데 비밀 경찰일 때는 어떻게 할지 생각도 없이 무작정 정체를 밝히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누군가. 시바처럼 에그발과 같은 비밀 경찰, 나아가 정권의 방식으로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공포를 잊으려는 누군가. 마지막으로 에그발처럼 자신이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도덕적 자책보다 신의 뜻을 행한다는 자위로 자신을 보호한 채 마지막 순간 진정으로 사과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과를 하는 누군가. 이 모든 비극은 결국 현 이란 정권이 만들어낸 비극이라 할 것이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란 정권에 의한 비극, 그러한 비극이 여전히 진행있는 현실을 마지막까지 청각적으로 조명한다. 에그발을 도시 외곽 나무에 묶어둔 채 집으로 돌아간 바히드는 자기 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정신이 없는 와중에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의족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영화는 돌아서서 굳은 채 서있는 바히드가 의족 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바히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에그발이 바히드가 누군지 알아내 그의 집으로 찾아와 의족 소리가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순간 뒤돌아 서있는 바히드는 바히드가 아니라 수많은 이란 국민 중 누군가로, 의족 소리는 에그발의 의족 소리가 아니라 이란 국민을 짓누르는 정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에그발의 사과가 진심이었는지, 마지막의 의족 소리가 에그발의 것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고의와 공포를 사고로 여기게 하는 이란 정권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현실만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러한 공포를 외면한 채 잠식되어 살아갈지, 공포에서 떨치고 일어날지. 이란 국민만이 아니라 우경화의 현실을 마주할 우리도 생각해봐야 할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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