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6) 큰 돌과 작은 돌에 대해서 이미 얘기하였는데, 여기에 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또 많은 전문 연구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선 바둑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가장 최초의 전거인 한단순(邯鄲淳)의 해당 원문을 살펴보자. (한단순의 예경(藝經)은 원전이 전하여지지는 않고, 사고전서에 인용되어져 전한다고 한다.)
棊局縱橫各十七道, 合二百八十九道, 白黑棊子各一百五十枚.
바둑판은 가로세로 각 17줄이고, 눈이 289개이다. 백과 흑의 바둑알은 각각 150개씩이다.
여기서 눈이 289개인데, 왜 바둑알이 총 300개인가? 이 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지금의 바둑에서는 눈이 361개이므로 바둑알의 개수 또한 정확히 361개이다. (육형제바둑의 최고급 바둑알인 대합 기석은 흑 181개, 백 180개이다.)
위소(韋昭)의 박혁론(博奕論)에도 '枯棋三百'(고기 삼백)으로 바둑알은 300개로 나온다. 그렇지만, 19줄 바둑판이라고 하면, 바둑알 300개는 좀 작고, 17줄 바둑판이라고 하면, 바둑알 300개는 좀 많다. 왜 그런가?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티벳 바둑을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The total of all the stones on a side is supposed to be 301, even though the traditional 17x17 (cloth) boards (I saw one 15x15) have only 289 intersections, Note that 289 + 12 = 301 (White has 151). (Peter Shotwell, 'Go in Tibet')
이상적인 바둑돌의 수는 총 301개이다. 바둑판의 교차점의 수 289에 12개의 보(Bo)를 합한 숫자. 이중 백이 151개를 갖는다. (남치형 역)
즉 티벳 바둑에서는 17줄인 바둑판에서 바둑알이 300개 또는 301개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289개에 추가로 바둑알이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장군 돌 Bo(Spo)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일본 정창원의 목화자단기국(木画紫檀碁局)과 은평탈합자(銀平脫合子) 그리고 홍아발루기자(紅牙撥鏤碁子), 감아발루기자(紺牙撥鏤碁子), 백기자, 흑기자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자. (아래는 연민수의 '일본 정창원의 백제유물과 그 역사적 성격'을 참조 인용)
정창원문서의 백제유물 관련 기록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이 일본의 당시 내대신(內大臣)인 중신겸족(中臣鎌足,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후에 등원(藤原, 후지와라) 성을 사성 받음)에게 적색 옻칠장(赤漆槻木廚子) 1개를 선물했다. 그런데 이 옻칠장 안에 납입되어 있던 물품 중에 바로 흑백∙감홍 2종류의 바둑알과 그 바둑알을 담았던 은평탈합자라고 하는 용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창원문서의 연력(延曆) 12년(793)의 폭량사해(曝凉使解) 문서에 따르면 4개의 은합에 600개의 바둑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정창원에는 감홍색이 각각 120개, 132개가 있고, 흑백색이 각각 119개, 145개가 남아있다. 그리하여 현재 남아있는 바둑알은 도합 516개이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서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선물인 바둑알 역시 300개 1 세트라는 것이다. (일부 한글 기사와 일본 웹에 보면, 홍아와 감아는 각 160개, 흑기자(사문석)와 백기자(석영)는 각 140개라고 하는 기록도 일부 있는데, 그렇다면, 원래 140개였던 백기자가 어떻게 지금 145개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이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일본 정창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으나, 바둑알 관련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T.T)
이 일본 정창원과 관련하여, 한국 바둑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이다. 그 목화자단기국 또한 바둑알과 더불어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 것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안영이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1) 우선 화점이 17개이니, 한국 순장바둑을 하기 위한 바둑판이다. 2) 바둑알만 보내고, 바둑판을 보내지 않았을 리가 없다. 3) 홍아, 감아 기자에 문양 되어 있는 새와 그 화점과의 조합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화점에 착점을 하게 되면, 새가 꽃잎 위에 앉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주의 재야사학자인 이승우씨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하고 있다. 1) 백제의 유물에 낙타가 새겨진 예는 없다. 2) 순장바둑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가 정설이다. 3) 바둑판은 의자왕의 선물 목록에 없다. (이상 '목화자단기국' 1400년 미스터리 풀리나?, 최병준 2013년 5월 25일 사이버오로 기획 참조)
이상에 대해 필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만약 바둑알의 전체 개수가 300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17줄 바둑판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목화자단기국이 19줄 바둑판이라면, 바둑알과 바둑판은 한 세트가 아니다. 일국의 국왕이 타국의 최고 실권자에게 준 선물에 흠결(부족한 바둑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안영이 선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목화자단기국이 19줄 순장 바둑판이라고 한다면, 목화자단기국은 홍아∙감아 발루 기자와 한 세트가 아니다. 목화자단기국은 순장 바둑판(17개 화점)이므로 한반도의 산물일 수는 있지만, 의자왕의 선물은 아닌 것이다.
사실 상단 그림에서 보듯이 목화자단기국은 비록 19줄이나, 테두리에는 돌을 놓기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므로 바둑알은 300개로 충분하다고 누군가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테두리의 줄에는 착점이 불가하였던 것일까? 이 경우, 그들은 이 바둑판으로 바둑이 아닌 다른 무엇을 하였을 것인가?
그런데, 테두리에 돌을 놓기 힘든 바둑판은 목화자단기국만이 아니다. 한대(漢代)의 바둑판(17줄), 수대(隋代)의 바둑판(19줄)도 마찬가지이었다.
테두리에 돌을 놓기 힘드므로 학자들은 이것이 정말 바둑판일까? 혹시 다른 용도의 기반은 아닐까? 또는 단순히 부장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정창원 바둑판은 부장품이 아니다.) 등의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테두리에 돌을 놓기 힘든 바둑판의 문제는 어지간히도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힌다.
(다음 편에 계속)
(201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