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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May 31. 2016

교황청이 로마에 있는 이유

조영필

"왜 교황청이 로마에 있나요? 예루살렘이 아니고." 내가 초6년 때 견진성사(세례 다음 단계) 받을 때, 교황청 특사(이태리人)에게 한 질문이다. 그러자 나이를 묻더니 나중에 크면 다 알게 될 거라고 하였다. 난 무슨 나의 큰 무식이 드러난 것 같아 얼굴이 빨개졌는데, 지금 보니 부끄러워할 것이 전연 아니었다. 이것은 지중해와 유럽의 씨줄 날줄에 대한 질문이었으니까.

   

그때 교황청 특사가 온다고 해서 평소(2명)보다 복사(사제의 미사 집전을 보좌하는 이)가 더 많이 (한 10명 정도) 필요해서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복사를 서게 되었다. (사람이 모자라니 신심이 부족한 내게도 기회가 왔던 것) 그때 나의 중형(仲兄)은 중3이었는데, 복사단의 선두(대장)로서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형은 그때 평소에도 복사를 많이 하였다. 그곳은 울산의 월평성당이다.

 

이제 어릴 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하여 본다.


예수 사후 초기에 5대 교회의 중심지가 있었는데. 지중해의 주요 도시인 로마, 비잔티움, 안티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그곳이다. 그 수장을 주교(bishop)라고 하였다. (카르타고와 밀라노에도 한때 주교가 있었다.) 이것은 이 도시들이 당대의 대도시였고, 또한 유대인들이 많았던 곳이어서 생긴 매우 자연발생적인 현상이었고, 어떤 강제된 원칙이나, 규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초기부터 (Pope Saint Clement 92-101) 로마교회의 우월적 권위(수위권, superior authority)를 주장하였다 (다른 교회들은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근거는 로마 교회의 초대 주교가 베드로이며, 베드로가 로마에서 네로 황제 시기에 박해를 받아 사망하였다는 신자들의 전승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객관성이 부족한 우김성 거증자료들을 신자니까 믿으라고 하면 이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AD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베드로의 순교지라고 믿어지던 자리에 그(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입교를 기념하여 바실리카(Basilica)를 세우게 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16세기 초 현재의 성 베드로 교회가 옛날 바실리카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그것은 오래된 (사실이 아닐 수 있는) 믿음이 건축물을 통하여 당대의 역사적 사실로서 지표면에 새겨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서로마의 멸망을 전후하여 로마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의 주교가 총주교라고 하면서 또한 우월권을 주장한다. 이는 대부분의 공의회가 황제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주교들은 로마 황제로부터 임명받는 형식을 취하였으므로, 사실 로마에서는 (동)로마 황제가 교황(교회의 우두머리)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로마의 주교는 AD 800년에 독자적으로 서로마 황제(카알 대제)를 세워 (동)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도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입지가 역전 된다.


10세기 경에는 이미 로마 주교(교황)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물론, 동로마 황제마저도 능가하는 권위를 확보하게 되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함락되고 나면, 유일무이 경쟁자 없는 절대적 종교의 중심이 된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역 전기이다. 사도행전의 전반은 베드로, 후반은 바오로가 중심인물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직전 제자이며 예수와 같이 아람어를 쓰는 어부 출신으로 주로 예루살렘 근교 및 유대인 집단을 이끈다. 그에 반해 바오로는 예수 사후 제자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당대의 지성인이다. 그는 당대의 세계어인 라틴어를 구사하며 지중해 세계 전역을 다니며, 비유대인을 포교한다. 소위 할례 없는 그리스도인이 그를 통해 가능해진다. 바오로의 로마 선교는 명확하며, 순교 사실도 정황적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베드로가 과연 로마에 갔는지는 그의 배경과 성향으로 보아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시몬이 베드로(게파 : 반석이라는 뜻)로 명명되는 성경의 장면도 로마 주교(교황)가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의 후계자이므로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단순한) 비유가 (후계의) 증거로 탈바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보면 교황청이 로마의 바티칸 언덕에 자리 잡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베드로에 대한 후계자 지명(반석) 가설, 베드로 로마 선교 가설, 베드로의 로마 순교 가설의 3가지 약한 고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가설 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사실은 첫째, (베드로가 아닌) 바오로가 로마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하고, 둘째, 로마의 역대 주교들이 미개한 게르만을 성공적으로 기독교 로마화 하고, 셋째, 이슬람 세력이 경쟁 교회들을 차례차례 몰락시켜준 덕분인 셈이다.


초대 교회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발흥지인 예루살렘 교회가 당연히 오늘의 교황청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중심인물은 베드로가 아니라 오히려 야고보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당시 주교좌 교회들 중에서 보면, 로마보다는 안티옥이 가장 큰 교회이었는데, 그 안티옥 교회의 주교가 바로 베드로이었다 (베드로가 안티옥에서 언제 로마로 갔을까?). 그러나 이슬람의 확장은 이 모든 자질구레한 사연들을 모두 삼켜버리는 거대한 파고이었다.


로마 시대 주교 교회들 중 가장 서쪽인 로마 언덕에서 자리잡은 로마 교회와 주교는 가장 강력한 박해의 중심에서 그 불굴의 선교 의지와 비타협의 수위권 주장으로 중세 유럽을 관통하는 최고의 이념적 권위를 스스로 확보하였다. 오늘날 서유럽이 쌓아올린 탐구정신으로서의 자연과학과 사회규율로서의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로마 교회가 설파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신념에서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로마 교회의 그 세 가지 가설의 주장과 그 성공적 실현은 이를 뒤집은 종교개혁과 민본주의를 통하여 인류 역사의 행운이자 현실이 되었다.


(2011. 06. 08 이후의 페이스북 대화로부터)



Note:

라은성, '로마 가톨릭 바로 알기', 기독신문 2005.04.25의 글 중 참고할 만한 내용을 부기함.


1439년 플로렌스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베드로론(petrine theory)은 1870년 1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믿음의 일’로 정의되었고, 1964년 2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확언되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만 교회의 수장직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를 ‘수제자’로 부르는 베드로 수위권에 대해 1차 바티칸 종교회의(1869-1870)는 요한복음(1:41, 21:15-18)과 마태복음(16:18-20)을 인용하고 있다.


1179년 3차 라테란 종교회의부터 추기경단이 콘클라베(conclave)라는 비밀회의를 통해 교황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출된 교황은 로마의 감독,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수제자의 계승자. 우주적 교회의 최고 성직자, 서방교회의 대주교, 이태리의 대주교, 로마지역의 대주교와 대감독, 바티칸 시의 주권자, 하나님의 종들의 종 들과 같은 칭호를 가지면서 막강한 상징적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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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아 메르틀, [누구나 알아야 할 서양중세 101가지 이야기] 56쪽. 73-8쪽 참조


로마의 주교는 제일 처음에는 주교관구의 성직자들과 국민들(선거권을 가진 유력 신자, 필자 이해)에 의해서 선출되었다. 중세 초기에는 로마의 명문귀족 가문들이 교황을 선정했다. 1059년에 반포된 교황선출 훈령에 의거해 사상 최초로 추기경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후 1179년에 이르러 오로지 추기경들로만 구성된 선거진이 투표에 참가해서 3분의 2 이상을 득표한 사람이 교황이 되는 다수결 원칙이 도입되었다.


8세기에 성화숭배와 성령의 유래를 놓고 동서로마 교회간 의견충돌이 빚어졌다. 그때까지 로마의 주교는 취임을 하기에 앞서 반드시 콘스탄티노플 궁성으로부터 선거 공고문과 신앙고백서를 보내고 검열을 받아야 했다. 비잔틴의 세력이 약해지고 교리논쟁까지 불거지면서 로마 주교들은 프랑크왕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와 로마의 주교(레오 9세)는 서로를 파문하였다. 이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Donation of Constantine)>라는 문서가 등장하게 되는 데, 그 내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실베스터 교황이라는 인물에게 서양 전체를 통째로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문서들을 교황들은 콘스탄티노플과의 수위권 투쟁시 유효적절하게 사용하는 데, 훗날 8세기에 위조된 문서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미 로마의 주교들은 로마를 권위의 중심지로, 그리고 자신들을 서방 교회 최고의 수장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1198-1216) 때 교황권은 절정에 달하는 데 그는 스스로를 베드로의 대리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 명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예수가 사도 베드로에게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다는 점과 세속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때는 언제나 죄를 지을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워 정치적으로도 교황이 세속군주들보다 상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로마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며, 종교개혁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시몬이 예수를 신의 아들 및 그 현현으로 신앙고백하였을 때, 예수가 한 인간인 시몬을 베드로(반석)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 그 자체를 반석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루터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로부터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받는 종교(구교)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종교(신교) 간의 갈림이 생긴다. 따라서 선행이 부족한 자가 중간과정으로 거쳐가야 하는 연옥도 그 존재기반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가톨릭의 전통적 제도와 사제의 권능이 부정되고 (만인제사장설), 직업에 대한 소명(Calling)과 운명예정설(캘빈) 등의 신학을 통하여 새로운 근대 시민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2021. 8. 9)


루터의 새 해석과 개신교의 융성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까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던 베드로론을 1870년 ‘믿음의 일’로까지 공표한 듯하다.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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