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고 일찍 자는 후배에게 늦은 밤 연락이 왔다. 너무 속이 상하고 참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열 받음’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고 지낸 십여 년 동안 그녀가 화를 냈던 적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물론 화를 내는 지점이 나와 미묘하게 달라서 볼 때마다 놀라긴 했지만.
“아니, 내 걱정을 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말이야……”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아버리는 ㅇㅇㅇ도사처럼, 나는 누군가 ‘그녀를 걱정하지 않고 던진 말’이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는 것을 눈치채 버렸다.
“시어머니한테 좀 서운한 것이 있어서 내가 그 말을 남편에게 했는데, 내 편을 안 들어주더라고. 워낙 남편이랑 시어머니랑 사이가 좋기도 하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기도 해서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일을 친구한테 말했더니, 친구가 자기라면 절대 못 참는다고, 절대 그런 남자랑 못 산다고. 어떻게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너에게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고, 네가 너무 불쌍하다고 막 그러는데, 아니, 내 생각해서 해 주는 얘기인 건 알겠는데, 난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난 아무 문제없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그랬다. 이번에는 나도 이해가 갔다. 그녀, 분노 게이지가 오를 만했다.
“걔가 가끔 그렇게 내 속을 뒤집어. 걱정돼서 하는 얘기인 줄은 안다고. 그런데 꼭 그렇게 동정하듯 내 말에 토를 다는데, 아주 미쳐 버리겠어. 이제 그런 얘기는 듣기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해?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해?”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법륜 스님이셨다면 뭐라고 하셨겠냐고 물었다. 후배는 법륜 스님의 책이라면 모두 읽고 강연회도 곧잘 참석하는 훌륭한 독자다. 물론 나는 스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멋진 말씀을 해주시지 않겠는가. 그 말을 떠올리고 후배의 분노가 잠잠해질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잘 해결되는 것이다.
“아니, 스님이셨다면 남의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살라고 하셨겠지. 그런데 너무 화가 나.”
후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 스님께서 해 주실 품위 있고, 사회생활에 영향 없고, 있어 보이는 좋은 답변도 다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런 답으로는 뻗쳐오르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어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좀 더 질 낮고, 세속적이며, 본능을 찌르는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인간, 그것이 나인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 사회에 쓰임새가 많다.
“돈을 달라고 해.”
숨겨왔던 답을 내가 말하자 후배가 “응?”이라고 움찔해서 물었다.
“그보다 먼저, 네 친구가 널 걱정해서 한 말은 아니야. 누군가를 걱정하면, ‘나라면’이라고 생각 안 해. 네 입장에서 네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들지. 그것부터 해야 걱정이 되든 동정을 하든 하지. 걘 그냥 너보다 자기 상태가 좋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한 거야.”
후배는 벌써 내 말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친구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은 맞을 거라고 우물거렸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다음에 또 그러면 동정을 하려거든 돈으로 달라고 말해. 말로 다 되는 거면, 우리는 일제 시대도 안 겪었고, 화성에도 갔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랑 꽁냥꽁냥 잘 살고 있을 거야. 세상은 말로 안 돼. 그러니깐 동정을 하고 싶으면 돈으로 하고, 위로도 주고 싶으면 선물 주면서 하라고 해.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IT 코리아에서 뭐하는 짓이야. 커피 쿠폰이라도 좀 쏘고, 케이크 선물이라도 하면서 동정도 하고, 위로도 하는 거라고 말하라고.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고 하면 내 이름 말해. 아님 내가 나가서 말해줄까? 다음에 그 친구, 어디서 만날 거야?”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쉰 후, 후배가 ‘픽’하고 웃었다. 작년 겨울에 넣어 놓았던 옷을 입으려고 이틀 동안 찾아다녔는데 결국 서랍장 제일 위에서 꺼냈을 때 낼 법한 웃음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잠시 후 좀 더 편안해진 웃음소리가 났다.
“됐어. 좀 풀렸어. 잔뜩 화가 났었는데 얘기 듣고 보니 좀 풀리네. 알았어. 다음에 또 그러거든 밥값 내라고 할게.”
“가능하면 그 친구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밖에서 밥 먹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으니, 그럼 그렇게 해.”
질 낮고 수준 없는 조언에 능하지만 의외로 마음은 넓은 내가 대꾸했다. 세상은 넓고 동정할 것은 많다. 그럴 때마다 맨 입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모든 사람들이 동정할 때는(하지 않으면 가장 좋지만, 죽어도 꼭 하고 싶다면) 돈으로 하시기 바라 본다.